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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보통의 학생/유학일기 in 독일

잘못 산 고기가 가져다준 행복

by 별_ 2020.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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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중에는 보통 귀찮고 힘들어서 학생식당을 가는데 코로나 때문에 이번 학기는 매 끼를 집에서 해 먹고 있다. 보통 아침에는 따끈하게 나온 빵과 커피를 마시고, 점심에는 밥과 반찬 혹은 볶음밥을, 그리고 저녁은 탄수화물 없이 야채와 고기나 생선을 먹는다. 요즘같이 헬스장이 문을 닫은 시기에는 운동할 때처럼 먹다가 금방 확 찐자가 되어버릴 수 있기에 주의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적었던 수입마저 끊긴지라 나의 식탁은 보통 가장 싼 음식으로 구성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독일은 식료품 가격이 한국에 비해 싼 편이라 혼자서 해 먹으면 돈을 꽤나 아낄 수 있다. 그런데 가공육 안 먹고 싼 고기를 먹으려면 결국 닭고기뿐이라 최근에 닭고기만 너무 많이 먹었다. 오랜만에 맛에 변화구를 주고 싶어서 소를 먹기로 큰 맘을 먹고 슈퍼에 갔다. 

보통 포장되어 파는 고기가 정육코너에서 직접 사는 것보다 싼데 포장되어 파는 것에 구워 먹기 적합한 고기가 없었다. 그래서 이왕 큰 맘먹은 김에 맛있는 걸 먹자는 생각으로 정육코너로 갔다. 유학생이 가장 늦게 배우는 단어가 요리나 음식에 관련된 단어가 아닐까 한다. 보통 유학생들이 식당 가서 밥을 사 먹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학생식당을 가도 맛으로 밥을 먹는 게 아니라 생존을 위해 먹는지라 (맛도 다 거기서 거기다) 메뉴를 읽지 않고 그냥 가서 먹는다. 스테이크로 적당한 소고기가 뭐냐고 물으니 이것저것 알려줬다. 그러다가 아는 단어가 나왔다. "Filet mignon" 가장 부드럽고 지방이 적은 부위니까 안심을 사면 실패는 안 하겠다 싶어서 필레미뇽으로 한 덩이를 썰어달라고 했다. 저울에 무게를 달아보니 한 덩이가 200g이 채 안된다. '너무 적은가?'라고 생각했지만 어차피 많이 먹으면 살만 찌니까 맛있는 건 맛만 보자는 생각으로 바로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대에서 찍힌 가격을 보고 깜짝 놀랐다. 200g도 안 하는 고기가 12 유로나 하는 게 아닌가? 물론 12 유로면 한국돈으로 대략 만 오천 원 정도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얼마 안 되는 돈 일수도 있다. 그러나 유학생이 하루도 아니고 한 끼 식사에, 그것도 밖에서 사 먹는 게 아니라 집에서 먹는데 12유로를 쓴다는 건 매우 이례적인 지출이다. 이미 포장도 했으니 환불할 수도 없고 그냥 나왔다. 다음부턴 100g당, 혹은 1Kg당 얼마라고 쓰여있는 가격표를 꼭 보고 사자는 교훈과 함께.

 

저녁이 되었다. 맛있게 먹고 싶어서 냉장고에 있던 고기를 상온에 잠시 놔둔다.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하고 올리브유로 코팅을 해 둔다. 30분 정도 상온에 놔두니 고기가 구워달라고 나를 쳐다보고 있다. 올리브 오일을 듬뿍 두른 프라이 팬을 달군다. 준비가 되고 고기를 넣는다. 튀기듯 구워지는 고기는 좋은 향이 난다. 고기가 타는 것 같이 연기가 나도 걱정할 것 없다. 시어링을 해서 육즙을 가둬두는 것뿐 타지 않으니까. 한쪽을 잘 구워서 육즙을 가둬 놨다면 반대로 뒤집어 준다. 똑같이 기름으로 바삭하게 구워 육즙을 가둬 놓는다. 어느 정도 익은 것 같으면 도마로 옮긴다. 난 집에 포크랑 나이프가 없기 때문에 도마에서 칼로 고기를 썰어준다. 완벽한 미디엄 레어.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고는 입으로 가져간다. 

 

 

미쳤다...

미친 맛이다. 너무 부드럽다. 씹을 때마다 고기 안에 갇혀 있던 육즙이 수문을 연 댐처럼 육즙을 뿜어낸다. 누가 안심이 향이 덜하다고 했던가? 묵직한 육향이 내 혀를 감싼다. '요리왕 비룡'의 대사처럼 표현을 해 보자면, 내 혀의 융털이라는 초원 위에서 소가 휘모리장단에 맞춰 넘실넘실 춤을 춘다. 아 육즙이여,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나에게 밀려오라. 아... 풀버전인 줄 알았는데 데모 버전이었다. 기분 좋게 날아가려다가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주저앉는다. 200그람도 안 되는 안심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안심을 산 건 내 실수였다. 원래 5유로 정도 되는 고기를 사고 싶었던 건데 예상보다 두 배의 지출을 했으니까. 그런데 실수로 산 고기가 가져다준 행복은 120유로 이상이었다. 

이건 Hallstattt에서 먹었던 Rumpsteak. 거의 인생 최고의 맛이었다. 에어 비엔비 주인이 추천해 준 맛집 "Apfelbaum"

인생 뭐 있나. 먹으려고 사는데 왜 그동안 나는 살기 위해 먹어왔나. 물론 그건 돈 때문이다. 이렇게 계속 먹으면 내 학업은 곧 접어야 할 거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인생의 가장 큰 목표이자 좋음이라고 말했던 행복을 잠깐이라도 맛볼 수 있다면, 가끔씩의 일탈은 나에게 선물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안심 스테이크가 가져다준 예상 못한 행복을 느끼고 나니, '다음번엔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나를 위해 안심을 사자'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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