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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보통의 학생/유학일기 in 독일

독일 대학에서 만났던 인상깊었던 교수들

by 별_ 2022.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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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하다 보면,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이전에 내가 똑똑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편이다.

예를 들어, 내가 A라는 사람에게 감탄했던 아이디어가 사실 다른 사람의 책에 쓰여있는 내용이면

'아, 이 사람이 생각해 낸 고유의 아이디어가 아니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A에게서 받았던 감탄의 크기가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 푹- 하며 쪼그라드는 것이다. 

한국에 있을 때는 '독일에서 철학 교수를 할 정도면 얼마나 똑똑한 사람일까?'라는 환상을 품었지만

막상 독일에 와보니 어디든 사람 사는 세상이 다 똑같더라.

오히려 독일어로 철학공부를 하고 논문을 낸 뒤 한국에서 교수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똑똑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는 내가 대학에서 만나고 감탄했던 몇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1. 석사 첫 학기에 만났던 K 

 

K 교수를 처음 본 건 내가 석사 1학기 때 들었던 수업에서였다. 

당시 나는 용기있게 (혹은 무식해서 용감하게) 6개의 세미나에 수강신청을 했다. 

그중 하나는 K 교수가 진행하던 '로버트 브랜덤의 헤겔 해석'이라는 세미나였다. 

로버트 브랜덤과 헤겔 모두 나의 관심사 밖이었지만 무작정 흥미로워 보여서 들어간 세미나였다.

당시 아직은 교수가 아니었던 K는 마치 비트겐슈타인을 연상케하는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으며 전체적인 첫인상은 데스노트에 나오는 L과 같이 뭔가 신비로우면서 지적인 느낌이었다. 

그의 수업은 오후 4시 부터 6시까지 진행되었는데 교탁에 서 있기보다는 앞의 책상에 엉덩이를 걸친 채로 비스듬히 서서 몽환적인 목소리로 굉장히 차분하게 수업을 진행했다. 수업이 끝나고 학교 옆의 교회에서 6시에 종소리가 울려도 그는 자신의 말을 끝내기 전까지 수업을 끝내지 않았다. 첫 학기 이기도 하고 어려운 내용이라 알아듣는 것이 많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세세하게 설명을 해서 '와 이 사람은 이 내용들을 정말 잘 이해하고 있구나'라고 감탄했다. 

K는 나에게 처음으로 발전의 기회를 제공한 사람이기도 했다.

이 수업을 들었다는 사실을 인증받기 위해서는 5장 가량의 에세이를 써야 했다. 

어학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최단기간에 대학에 들어 온 나였지만 대학에 오니 다 독일어가 모국어인 독일인들 뿐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나는 내 독일어가 얼마나 잘못된지 인지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내가 에세이를 제출하자 K는 정중하게 나에게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기간 내에 에세이를 제출해줘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독일어에 문법적으로나 표현적으로나 오류가 너무 많아서 내가 이 글을 받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만약 이 수업을 들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한다면, 독일인이나 주변인들에게 당신의 텍스트를 교정받아 오세요."

나는 이 말이 참 고마웠다. 덕분에 무엇이 잘못된지 알았고 뭘 해야 하는지도 알았으니까.

결국 나는 에세이를 제출하고 세미나를 수강했다는 증명서를 받을 수 있었다. 

다음 학기에 K의 수업이 하나 있었지만 듣지 못했고

이후에 K는 북유럽의 한 국가에서 교수가 되었다. 

요즘도 가끔 강연 같은 곳에서 그의 소식이 들려온다.

조만간 독일에서 교수도 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다.....

만, 우리 학교에 있는 모 유명교수를 보면 유명세와 실력은 딱히 비례하지는 않는 것 같다.

 

2. 수업 준비를 정말 열심히 해 오던 Z 교수 

 

Z 역시 내가 수업을 들었을 때 교수 신분은 아니었고

독일의 교수자격 논문 '하빌리타치온Habilitation'을 준비하고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Z의 칸트 역사철학 수업을 들었다.

한국에서 칸트의 역사철학에 대해서 배운 적이 없었기에 매우 흥미로운 주제였는데,

Z가 한 수업을 들은 덕에 많은 내용을 배워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Z 역시 K 처럼 매우 차분하게 수업을 진행했다. 

말을 매우 천천히 하면서 세세한 내용 하나하나를 꼼꼼히 말해 주는 게

친절하기도 했지만

이 사람이 정말 내용을 잘 이해하고,

무엇보다 '수업 준비를 정말 열심히 해 오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K와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Z는 무슨 말을 하고 있든 수업시간이 끝나면 칼 같이 세미나를 끝냈다.

 

이 세미나를 들었다는 증명을 위해 세미나 하나의 '프로토콜 Protokoll'이라는 것을 제출해야 했는데

당시 나는 프로토콜이 뭔지 자세히 몰라서 에세이 형식으로 텍스트를 제출했었다. 

그러자 Z 교수는 친절하게 내가 낸 것은 프로토콜이 아니라 에세이에 가까우며,

오히려 프로토콜은 우리가 수업 때 토론 한 내용을 단순 정리하면 되는 것이라 더 쉬울 테니

다시 한번 프로토콜을 써 보라고 알려주었다. 

덕분에 제대로 된 프로토콜도 써 보고 Z에게 소논문도 제출했었다. 

우리 학교는 따로 시험을 보는 게 아니라 소논문을 통해 점수를 매기는데,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문법적인 실수가 많지만 Z는 나의 언어적 어려움을 이해해주며 나름 괜찮은 점수를 주었다. 

Z 역시 이후 하빌리타치온을 끝내고 지금 타 학교의 교수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

만약 내가 칸트를 전공했다면 이 사람을 지도교수로 하고 싶었을 정도로 수업의 질이나 인간적으로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3. 마지막 수업을 함께 했던 T 교수

 

첫 학기에 만났던 T 교수는 아직까지도 내 뇌리 가장 깊숙한 곳에 박혀있는 사람이다. 

나는 '에밀 라스크의 피히테 해석'이라는 수업을 들었는데

에밀 라스크든 피히테든 정말 생소했지만

어차피 독일까지 온 거 모르던 거 다 들어보자는 생각으로 들어갔던 수업이었다. 

당시 6명의 학생이 수업을 들었고

덕분에 수업은 일방적인 지식 전달이 아니라 상호 간 토론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나의 독일어 실력은 지금보다 더 처참했지만 T 교수는 절대 재촉하지 않고 내가 답변을 어떻게든 끝마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인상 깊었던 점은

T 교수는 언제나 학생들이 수업 때 나오는 개념들을

어려운 철학적 용어가 아닌 자기 자신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 몰아갔는데

나에게는 마치 이른바 '지식의 산파술'을 하는 소크라테스 같이 보였다. 

나중에 T 교수의 친구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T 교수는 어릴 때부터 매우 뛰어난 학생이었지만

마기스터 (지금의 석사와 비슷) 과정 후 학교에서 종적을 감췄다.

그리고 우연히 T의 지도교수인 H교수가 자신의 고향인 뮌헨 München에 가서 택시를 탔는데

그 택시기사가 바로 T 였다.

H 교수는 너무 놀라서 

"아니 네가 내 학생 중에 최고의 학생이었는데 너 지금 뮌헨에서 뭐 하는 거야?"라고 하자

T가 너무나도 해맑게 웃으며

"나 택시운전하는데?" 

라고 말했다고 한다.

알고 보니 T 교수가 결혼을 빨리하고 애가 세명이라 경제적인 이유로 학업을 관둔 것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H 교수가 T에게 장학금과 강의 기회를 주어서 T는 결국 박사를 끝마쳤다.

아쉽게도 중간에 쉰 부분이 있었고 공부를 너무 오랜 시간 꼼꼼히 한 T는 교수 자격 논문을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대학의 정교수가 되지는 못했다. 

 

그랬던 T 교수의 마지막 강의를 내가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는 우리에게 물었다.

"철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그리고 그가 다시 답했다.

"자신만의 생각을 갖는 겁니다. 어떤 다른 의견에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언제까지나 공부하며 그 생각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겨울 수업이라 수업이 끝난 뒤에는 크리스마스 마켓에 다 함께 놀러 갔다. 

내가 말이라도 한번 걸어보고 싶어서 T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우리 수업 때 A 교수 텍스트를 많이 읽었는데, 한국에서 제 지도교수가 A 교수 밑에서 박사를 했어요. 그래서 더 흥미로운 수업이었습니다. 그래도 수업 때는 말을 많이 못 해서 아쉽습니다. 독일어가 너무 어렵네요 ㅎㅎ"

그러자 그가 웃으며 내게 말해주었다.

"너 독일어 잘해. 나랑 이렇게 대화 잘하고 있잖아. 걱정하지 말고 꾸준히 그렇게만 해. 항상 용기 잃지 말고."

이 말을 끝으로 그는 자신의 몽골인 부인과 함께 유유히 사라졌다. 

그게 내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T의 지도교수인 H 교수는 지금까지도 매우 저명한 독일의 철학자인데, H 교수 밑에서 박사를 했던 친구의 말에 의하면 H 교수 역시 뛰어난 실력뿐 아니라, 학생들을 인간적으로 대하는 훌륭한 스승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뛰어난 스승의 좋은 점을 보고 성장한 제자들도 그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자신의 제자들에게 스승의 가르침을 돌려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나도 누군가의 스승의 되는 날이 온다면, 제자들에게 좋은 동기부여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물론 그전에 박사논문부터 마무리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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