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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보통의 학생/유학일기 in 독일

독일에서 석사 하기 2] 정신없던 첫 학기

by 별_ 2022.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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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학에서도 나름 학점이 좋은 편이었고, 어릴 때부터 언어에는 재능이 있다고 생각 (착각이었다...)했고, 독일어 어학도 한방에 끝냈으니 나는 앞으로 펼쳐질 대학생활이 매우 순탄할 것이라 생각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독일 친구들을 사귀고 그들과 어울리며 독일어가 늘고 시험에선 항상 좋은 성적을 받아 4학기 만에 졸업한다.라는 상상은 현실이 되지 않았다. 일단 처음부터 멘붕이었던 게 수강 신청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 DSH가 대학 입학을 위한 독일어 시험이라지만 수강신청 시스템에 있는 독일어 단어들은 너무나 생소했다. 다행히도 수강신청을 위한 설명회가 있어서 갔는데 다들 왜 이리 독일어를 빨리 하는지... 결국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옆에 앉아있는 독일인들에게 웃으며 말을 걸고 질문도 해봤지만 다들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독일어 실력이 좋지 않으니 대화도 길게 가지 못했고 결국 나는 독일어라는 큰 벽이 내 앞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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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마다 졸업요건이 다르다. 우리학교의 경우에 석사과정을 졸업하기 위해서는 7개의 모듈에서 18개의 세미나를 이수해야 하며 각 모듈마다 하나씩의 시험을 봐서 통과한 뒤 석사논문을 제출하면 된다. 글로 쓰니까 매우 쉬워 보이지만 독일어로 학위를 한다는 게 만만한 게 아니다. 독일의 대학 강의는 우리나라에 비해 세분화되어있다:

1) Vorlesung: 우리나라의 일반 수업과 비슷하다. 교수가 가르치는 위주로 수업을 진행한다. 우리 학교의 경우 석사과정엔 Vorlesung이 없었고 Seminar만 있었다.

2) Seminar: 세미나는 교수가 수업을 주도하기보다는 학생들이 각자 파트를 나눠 발표를 하고 그 발표를 주제로 학생들끼리 토론을 하고 교수가 정리해주는 식의 수업이다. 

3) Kolloquium: 우리 학교에서 콜로키움은 보통 박사과정생이나 박사들이 자신의 연구주제나 관심 주제를 가지고 발표를 하고, 참가자들이 질문을 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가끔은 다른 학교의 교수들이 발표를 하기도 한다.  

4) Tutorium: 투토리움은 도와주는 사람이 있고 수업에서 부족한 것을 보충해주는 보충수업 같은 시간이다. 예를 들면 헤겔의 "정신현상학"세미나가 있으면 그 세미나에 대한 투토리움이 있는데, 세미나에서는 수업을 하고 투토리움에선 박사과정생이 같이 강독을 하거나 질문에 답을 한다. 

나는 처음에 투토리움을 들어갔는데 지도하는 박사과정생이 교수인 줄 알고 깍듯하게 인사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도 나는 3학기 동안 매 수업의 첫 시간이 끝나고 담당교수에게 가서 "나는 한국에서 왔고, 독일어를 아직 잘 못하지만 앞으로 열심히 해보겠다"라고 말했었다. 4학기부터 그런 걸 안 한 이유는 간단하다. 일단 교수들은 동양 학생을 보면 그 학생이 이 수업을 다 이해한다는 기대가 별로 없는 듯하다. 그리고 내가 수업을 열심히 하고 안 하고는 내 일이지 그들의 일이 아니라 그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 그냥 내가 열심히 들으면 그걸로 된 것이다. 이런 것도 독일과 한국의 차이점인 것 같다. 

 

학교에서 추천하는 과정은 처음 1년 동안 12개의 세미나와 4개의 하우스아르바이트를 쓰고 3학기 때 6개의 세미나와 3개의 하우스아르바이트를 쓴 뒤 4학기 때 논문을 내고 졸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매우 어려워서 독일 학생들도 보통 5~6학기 정도 걸린다. 세미나를 이수하는 법은 보통 1) 발표를 하거나, 2) 짧은 에세이를 쓰거나, 3) 프로토콜을 쓰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누구도 나에게 Hausarbeit와 Essay와 Protokoll의 차이점을 알려주지 않아서 이걸 아는데 3학기가 걸렸다. 

1) Hausarbeit: 소논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나는 처음에 집안일 (Haus+Arbeit)을 하라는 건 줄 알았는데 대강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집에서 15장에서 20장의 글을 써오면 된다. 보통 쓰기 전에 교수와 주제가 적절한지 검사를 받고 시험을 등록해서 제출하면 이게 모듈의 시험이 된다. 학업적인 글, 그러니까 논문을 쓰듯이 형식을 잘 맞춰서 써야 한다.

2) Essay: 에세이는 Hausarbeit보다 짧고 형식이 자유로운 글이다. 보통 주제도 교수와 상의할 필요는 없고 3~7장을 쓰게 된다.

3) Protokoll: 프로토콜은 보고서다. 그러니까 1. Seminarsitzung에 대한 Protokoll을 쓴다면 첫 세미나에서 들었던 것을 정리하면 된다. 에세이와 하우스 아르바이트에 비해 자기 생각을 많이 적는 건 아니라 쉬워 보일 수 있지만 상당히 까다로운 게 수업 내용을 알아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석사를 졸업한 지금도 수업을 들어가서 독일어를 알아듣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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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학기에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학교에서 말한 대로 6개의 세미나를 신청했다. 

1)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 헤겔의 정신현상학. 한글로도 어려운데 이걸 독일어로 하려니 정신이 없었다. 매우 유명한 교수의 강의였는데 처음에 이 교수를 지도교수로 하고 싶어서 들었다. 이 교수는 천재고 목소리도 좋고 친절한데 약간 정신이 산만하고 자신의 세계가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인맥을 쌓길 좋아하고 방송이나 인터뷰를 많이 하는, 전형적인 유명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이어서 이 사람을 지도교수로 하겠다는 생각은 이 수업을 끝으로 접게 되었다. 

2) Robert Brandom, "Wiedererinnerter Idealismus" - 사실 헤겔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로버트 브랜덤에 대해서도 배경지식이 없어서 매우 힘들었던 수업. 그런데 교수가 참 좋았다. 차분하고 꼼꼼한, 데스노트에 나오는 L과 비슷한 강사였는데 지금은 노르웨이에서 교수를 하고 있다. 내 글에 대한 피드백을 정말 자세하게 써줘서 내 독일어 텍스트에 문제가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해 준 고마운 교수다. 만약 이 사람이 교수고 내가 헤겔 전공이었다면 지도교수로 택하고 싶었다. 

3) Emil Lasks Fichte-Interpretation - 피히테도 제대로 몰랐는데 정말 에밀 라스크라는 사람은 처음 들어봤다. 다행인 점은 교수가 너무나 좋았다는 점이다. 은퇴를 앞두었던 이 교수는 학생들이 어렵게 말하면 계속 너무 어렵다고 하며 쉬운 자기만의 언어로 바꿀 때까지 기다리고 유도하는, 지식의 산파 같은 사람이었다. 교수 덕에 즐겁게 수업했던 기억이 난다.

4) Michel Foucault. Archäologie des Wissens - 한국 선생님의 수업이었다. 이분은 지금 다른 대학의 정교수가 되었다. 한국 선생님이라 수업이 끝나고 책거리를 했다. 그때 선생님이 나에게 이것저것 많은 조언을 해 주셨다. 한국인이 혼자 꿋꿋하게 수업 듣는 게 보기 좋다며 박사까지 할꺼라면 그냥 꾸준히 하면 된다고. 참고하면 된다고만 하셨다. 그때는 그 꾸준히가 얼만큼인지 몰랐다... 이렇게 길 줄이야...

5) Gegenwartsphilosophie - 헤겔 교수가 하는 콜로키움이었다. 이 교수가 너무 유명한 사람이라 매 수업마다 발표할 사람이 있었으므로 나는 발표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첫 학기라 정말 하나도 못 알아들었던 기억이 난다. 현대철학에 대한 발표들이었는데 가끔은 영어로 발표하는 외국인들도 있었다. 

6) Tragisches Lebensgefühl und vitale Vernunft - 이건 남미 철학이라길래 특이해서 들어봤다. 이 수업도 교수가 친절했다. 그런데 교수가 인간적으로는 친절한데 수업은 너무 중구난방이었다. 철학과에 꼭 있는 자기만 이해하고 설명은 못하는 그런 교수였다. 그래도 인간적으로 친절해서 도움도 받고 이해도 많이 해줬다. 이 수업으로 처음 발표를 해봤는데 텍스트 해석이 너무 오래 걸려서 그렇지 발표를 그렇게 못하진 않아서 용기를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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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선생님이 첫 학기에 하우스아르바이트는 어차피 못 쓰니까 그냥 첫 학기는 경험 삼아 다녀보라고 했지만 그래도 하나는 쓰고 싶어서 결국 지도교수로 생각하던 교수에게 Hausarbeit를 쓰겠다고 찾아갔다. 교수는 너무도 친절했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그냥 관심이 없는 거였다. 이때는 정말 Hausarbeit가 뭔지도 몰랐고 논문 형식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그러니까 각주나 인용을 어떻게 하는지 아무것도 모를 때였다. 그래도 콜로키움을 들으니까 콜로키움을 진행하는 박사과정생에게 내 글을 좀 봐달라고 부탁한 뒤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엉망이었다. Hegel의 bestimmte Negation의 역할에 대해 썼었는데 처음 시작한 아이디어는 괜찮았는데 독일어로 20장이나 되는 글을 처음 쓰다 보니 가면 갈수록 엉망이 되었다. 근데 그때는 그게 엉망인 줄도 몰랐다. 나는 그때 DSH를 합격했고 아무도 내 독일어에 대해 말해주지 않아서 내가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 줄 알았다. 정말 헤겔적으로 말하면 '즉자적'상태에 머물러 있었고 독일 사람이 글을 봐준다고 했으니 다 잘 될 거라고만 생각했다. 너무나 나이브한 생각이었다. 글을 고쳐준다는 그 박사과정생 친구는 내 글을 제대로 봐주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그게 다 잘 썼다는 줄 알고 글을 제출했다. 교수가 받아보고 정말 황당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교수는 너무 바빠서 내 시험 점수를 무려 1년 뒤에 입력해 줬는데 (지금 생각하면 감사하게도) 4점을 줬다. 4점은 ausreichend. 그러니까 한국으로 따지면 D다. 한국에선 B+이하로는 받아본 적이 없었지만 이 점수를 받고 나서는 그냥 안도했다. 1년 동안 떨어지면 이걸 또 써야 하나 걱정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내 추측인데 이 교수는 내 글을 제대로 안 봤거나, 다른 글을 또 채점하기 싫어서 4점을 준 것 같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나는 첫 학기에 6개의 세미나를 이수하고 하우스아르바이트도 통과했다. 첫 학기치곤 나름 선방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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