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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소고 (小考)

르네 마그리트 - 헤겔의 휴일

by 별_ 2020.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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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e Magritte, Les vacances de Hegel

 

 

 

마그리트의 그림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당혹감을 느끼게 한다. 그는 익숙한 사물을 과장하여 크게 그리거나 전혀 다른 배경에 배치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일반적이지 않은 대상들의 대비는 마그리트가 마치 자신의 작품을 통해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풀어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의 작품에 생각의 즐거움을 더하게 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바로 제목이다. 직관적으로 그림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제목은 책의 앞부분에 쓰인 설의법처럼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헤겔이 사용하는 '규정적 부정 bestimmte Negation'이라는 개념은 스피노자의 명제인 "모든 규정은 부정이다 Omnis determinatio est negatio"에서 나왔다. 이 명제를 이용하여 헤겔은 부정이 가진
'규정 Bestimmung'이라는 기능에 주목한다. 규정은 인식의 전제조건이다. 우리는 규정되지 않은 것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로 인식한다'는 것은 '~로 규정되어있다'와 같은 말이다. 헤겔은 인식대상을 '관계 Beziehung' 속에서 바라보았다.
'헤겔의 휴일 Les vacances de Hegel'에는 관점에 따라 크게 두 가지의 대비되는 대상 Gegenstand이 관계 속에 놓여있다. (1) 먼저, '기능ἔργον'의 측면에서, 물을 담는(혹은 보존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컵과 물(비)을 밀어내는 기능을 수행하는 우산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2) 혹은 '물을 부정하는지'의 여부를 통해 컵 속에 들어있는 물과 우산을 대비시켜 볼 수도 있다. 물은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여 물로써의 규정성('물임')을 유지하고 있고 우산은 물을 밀어내기 때문에 헤겔의 용어로 물을 부정한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는 이 그림에서 헤겔의 개념인 '규정적 부정 bestimmte Negation'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컵과 우산은 서로 반대되는 기능을 통해, '물을 담는' 사물 Ding과 '물을 밀어내는'사물로 규정되고 우리에게 인식된다. (2) 우산은 물을 부정하면서 자신의 규정성 Bestimmtheit을 유지한다. 우산은 물을 부정하는 기능을 하는 사물로 규정되고, 그렇게 인식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위 작품에 대한 마그리트의 설명이다: "내 최근의 작품은 이러한 물음으로 시작되었다: 어떻게 한 컵의 물을 주제로 한 작품을 그릴 수 있을까. [중략] 그리고 그 선(드로잉의 선)은 확장되고 우산의 형태가 되었다. [중략] 이는 나에게 처음의 물음에 대한 답처럼 보였다. 이렇게 탄생한 그림을 '헤겔의 휴일'이라고 불렀다. 내 생각에, 헤겔이 이러한 두 가지 반대되는 기능들(물을 담고 밀어내는)을 가진 대상을 마음에 들어할 것 같았다. 이것은 마치 휴가를 맞이하는 것 같이 그를 기쁘게 할 것이기에 (제목을 헤겔의 휴일이라고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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