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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보통의 학생/유학일기 in 독일

키스를 보는 사람과 키스를 찍는 사람

by 별_ 2020.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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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때 교양수업으로 '미술사'라는 과목을 들은 적이 있다. '미술사는 공부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점수 따기가 쉽지 않다'는 선배들의 말을 듣긴 했지만 나에게는 '대학이 아니라면 듣기 힘든 수업'이라는 메리트가 훨씬 더 크게 작용했기에 망설임 없이 수업을 들었다 (재미있게 들으니 점수도 잘 나왔다). 개인적으로 지루했던 건축사 부분이 끝나고 근대 회화로 넘어오니 슬슬 내 마음에 드는 그림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중 내 맘을 빼앗은 그림이 있었는데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디트'라는 그림이었다. 

 

적장의 목을 들고 옷을 풀어헤친 채 뭔가 당당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듯 한 유디트, 심지어 클림트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황금색이 더해져서 더더욱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미술사 수업 이후에 한동안 클림트의 화려한 그림들에 빠져 살았는데 우연인지 인연인지 학기가 끝나고 얼마 뒤, 그러니까 내가 군대에 입대하기 일주일 전에 클림트의 전시회가 한국에서 열렸다. 친구들이 다들 군대에 갔던 시기이기도 하고, 혼자서 좀 천천히 그림을 감상하고 싶어서 혼자 전시회를 갔다 (그 이후로도 미술관은 거의 혼자서만 다녔다). 내가 알던 화려한 golden period의 클림트뿐 만 아니라 다양한 클림트의 작품을 실제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전시된 그림 중에는 내가 좋아했던 '유디트'도 있었다. 매번 PPT에서 보던 그림을 실제로 봐서 신기했다. 놀라웠던 점은 내 생각보다 유디트라는 그림이 상당히 작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오히려 유디트가 큰 그림이었다면 그녀의 표정이 저 정도로 강렬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전시회에 가서 나는 클림트의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인 '키스'는 외부로 반출이 안되고 오직 오스트리아 빈 Wien에 있는 벨베데레 궁전 Schloss Belvedere에서만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꼭 직접 내 눈으로 클림트의 '키스'도 보고 오겠다고 다짐했다. 

 

 

전역을 하고, 졸업을 한 뒤 나는 배낭을 메고 유럽으로 떠났다. 여행의 목적지에는 그토록 보고 싶던 클림트의 '키스'가 있는 Wien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서 나는 유디트를 다시 만났다. 기분이 묘했다. 한국에서 보았던 유디트를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오스트리아에서 보게 되다니! 그림 속 유디트의 표정은 여전히 강렬했다. 그리고 무언가 화려한 방에 다다랐을 때 나는 이곳이 클림트의 golden period의 그림들이 모여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눈 앞에는 과장을 조금 보태서 '대동여지도'만 한 크기의 '키스'가 있었다. 

압도적인 크기와 화려함에 한참을 넋 놓고 보고 있었다. 그림을 보면서 '왜 이렇게 그렸을까?' '이건 무슨 뜻일까?' '왜 여기엔 이 색을 썼을까?'등등 생각을 하다 보니 미술관에 있는 그림을 다 보는데 4시간 정도가 걸렸다. 그 날은 숙소에서 바로 뻗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림을 보면서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느꼈다. 거기 있는 사람들 중 거의 대부분이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사진을 찍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패턴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먼저 그림을 보고 감탄을 한 뒤, 앞의 사람이 빠지기만을 기다렸다가, 사람이 빠지면 바로 사진을 찍고, 사진이 잘 나왔는지 확인을 하고 곧바로 자리를 떴다. 그들에게는 클림트의 '키스'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클림트의 '키스'를 보고 왔다는 사실을 증명할 기록물을 남기는 것이 더 중요해 보였다. 그중에는 SNS에서 like를 받는 것이 지금 이 순간의 경험을 온전히 느끼는 것보다 중요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마다 다양한 사정이 있을 것이고 관심사가 다르니까. 자기 돈 주고 자기가 온 것인데 어떤 행동을 하든 남에게 피해만 안 준다면 그건 자기 마음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카메라가 없는 시대에 이 그림을 보러 왔다면, 오히려 사람들이 그림에 더 집중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나는 원래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는 것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게 사진은 그냥 '스탬프'같은 것이다. 오히려 나에게는 사진보다 그 순간 경험에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사실 '키스'를 찍지 않았다는 것도 미술관을 나와서 지하철을 타고난 뒤에야 깨달았다. 덕분에 나는 그 뒤로도 두 번 더 벨베데레에 갔다. 아쉽게도 유디트는 갈 때마다 다른 미술관에 전시되어 볼 수 없었지만 '키스'만은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위의 사진은 내가 3번째로 벨베데레에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사진만 찍고 자리를 떴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만큼 다양한 사정이 있을 테니 그들의 행동을 내가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명의 이기'가 오히려 사람들의 낭만을 빼앗아간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되는 것도 어쩔 수가 없다. 때로는, 아름다운 순간을 카메라에 담기보다 눈으로 담는 데에 집중해 보는 것은 어떨까? 어쩌면 잊고 지냈던 '순간의 아름다움'을 다시금 느낄 수 있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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