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끈이 길어지다 보니 많은 선생님을 만났다. 오늘은 독일에서 만난 교수님 중에 기억에 남는 한 분에 대한 글을 써 보고자 한다.
독일에 와서 첫 학기에 6개의 수업을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무지했기에 용감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첫 학기에는 더더욱 수업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을 따라가지 못했고 거의 출석 도장만 찍는 식이었다 (그래도 수업을 pass 하기 위한 모든 것을 다 해냈고 그랬기 때문에 졸업도 할 수 있었다). 이 글에서 이야기해 보고자 하는 Z 교수는 첫 학기에 들었던 수업에서 만난 교수이다. 지금은 교수직에서 물러나 우리 학교에서는 강의를 하지 않고 고향에 있는 대학에서 가끔 강의를 한다고 들었다. 그가 강의했던 수업은 '에밀 라스크의 피히테 해석'이라는 수업이었는데 학부 시절 피히테와 관련된 글 조차 읽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당연히 피히테의 철학을 해석한 에밀 라스크라는 사람 역시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첫 학기의 나는 아직 매우 열정이 넘쳐서, 이왕 유학 나온 거 한국에서 접하기 힘든 수업을 듣자는 패기가 있었다. 수업 첫날 강의실에는 나를 포함한 6명의 학생이 있었다. 나 말고는 다 독일인이었다. 뻘쭘하게 앉아 있는데 Z 교수가 들어왔다. Z 교수의 인상은 동네에 사는 인심 좋은 아저씨 같았다. 각자 자기소개를 한 뒤 세미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첫날의 수업은 금방 끝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긴 하는데, 4학기가 되기까지 나는 첫 수업이 끝나면 항상 교수에게 가서 '나는 한국에서 왔고 독일어를 아직 잘하지 못한다. 그러나 열심히 해서 빠르게 적응해 볼 수 있도록 하겠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독일 대학에서 교수나 강사들은 일단 외국 학생이 독일어를 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고, 사실 그 학생이 수업을 잘 듣든 못 든든 별 관심이 없다. 아무튼 나는 열심히 하고자 하는 내 의지를 보여주고자 그런 이야기를 하고 다녔는데 Z 교수는 나의 어설픈 독일어를 끝까지 참고 기다려주면서 '네가 내 수업을 듣는다니 좋다. 학업에 행운을 빈다'라고 말해주었다. 그는 말할 때 언제나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는데, '대 철학자 병'을 조심하라는 말이다. 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일상의 언어와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될 만큼의 어려운 글들을 읽는데, 자기 자신이 이해를 제대로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에게 어려운 단어를 써서 자기가 아는 것을 뽐내려고 하는 사람들을 '대 철학자 병'에 걸렸다고 말한다. 나 역시 한국에서 이런 사람들을 많이 봤고 (사실 거의 다 이렇다) 독일에서도 그런 학생들은 많았다. 그중에서도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생소한 용어를 아무런 설명 없이 그대로 사용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럴 때마다 발표자들에게 '근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라고 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의 용어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X=X다 식으로 동어 반복만 계속했다. 이런 식의 발표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듣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이해가 안 가는 무지의 순환에 빠지게 되어 정신적으로 매우 피곤하다 (듣는 시간도 너무 아깝다). 하지만 대부분의 수업에서는 이런 식의 나이브한 발표를 그냥 대충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Z 교수의 수업에서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이러한 방식의 대답을 들으면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질문을 던졌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가 수업에서 "A라는 게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이라고 물어보면 한 학생이 철학자가 말한 그대로 책을 읽는 수준으로 대답을 한다. 그러면 Z 교수는 "너무 어려워. 그게 무슨 말인지 한번 너만의 단어로 설명해봐"라고 묻는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그가 제대로 된 답을 할 때까지 기다려주면 결국에는 학생들이 자기가 말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단어로 그 개념에 대해 설명을 한다. 물론 100% 완벽한 설명은 아니겠지만 그게 맞든 틀리든 결국에 자기 자신만의 용어로 이해하려고 노력한 그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나는 그의 수업 방식이나 학생 개개인을 인격체로 대하는 그의 태도가 너무 마음에 들었고 '이런 사람 밑에서라면 박사도 하겠다'라고 까지 생각했다.
아쉽게도 그 수업이 우리 학교에서 하는 그의 마지막 수업이었다. 그가 마지막 수업 때 말했다. "철학을 공부할 때 가장 중요한 게 뭘까?" 여러 답변들이 나왔다. 학생들의 답변을 하나하나 경청한 그는 마지막에 자신의 생각도 들려주었다. "지금 말한 것들이 다 중요하다. 그런데 내가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너희들 고유한 관점을 가지고 철학을 하는 것이다. 공부하면서 다른 것을 잃을 수도 있겠지만 너 자신의 관점만은 절대로 잃지 않기를 바란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다 같이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글뤼바인 Glühwein을 마시러 갔다. 그곳에서도 그는 학생들 한 명 한 명과 대화를 했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나도 토론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은데 독일인들만 있는 곳에서 이야기를 하려니 쉽지 않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너 이미 독일어 잘해. 그러니까 자신감 갖고, 누가 뭐라고 하든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말을 해" 짧은 대화였지만 그의 말은 나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그렇게 Z 교수는 대학을 떠났다. 지금 나에게는 가장 친한 독일인 친구가 있는데 (친구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좀 많지만) 알고 보니 Z 교수가 그 친구가 학교를 다닐 때 같이 다녔던 친구라고 했다. 그러면서 친구가 Z 교수가 교수가 된 이야기를 들려줬다. Z 교수는 학생 때 역시 성격 좋고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다. 그렇게 공부를 하다가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생계를 이유로 학업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지도교수가 고향에 내려갔다가 택시기사가 된 Z 교수를 만나게 된다. 지도교수는 너무 놀라서 "네가 내 학생 중에 최고의 학생이었는데 갑자기 왜 택시기사가 된 거야?"라고 묻자 그는 "아 애 낳고 돈이 없어서 돈 벌려고 하는 거지"라고 태연하게 답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도교수가 "내가 장학금이랑 연구비 지원해 줄 테니 다시 공부해라"라고 말해서 다시 학교로 돌아와 박사를 따고 늦은 나이에 박사 자격 논문까지 통과헀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참 인생이란 게 어디로 흘러가고 언제 어디서 어떤 기회가 찾아올지 모르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Z 교수. 그의 수업을 많이 들은 건 아니지만 그가 해줬던 많은 말들이 아직까지도 내 학업과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언젠가 다시 한번 만날 날이 있으면 좋겠다. 물론 그가 나를 기억하진 못하겠지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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