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학가에 떠도는 유명한 말이 있다:
공산주의가 왜 망했는지 알고 싶다면 조별 발표를 해 보면 된다
한국에서의 학부생 시절 나는 이 말을 첫 조별 발표에서부터 뼈저리게 느꼈다. 당시 나는 학부생이라면 필수로 들어야 했던 '심리학'수업을 들었는데 조별과제가 무려 '악플에 관한 UCC 만들어오기'였다. 우리 조는 7명이었는데 정말 각자 다른 사람 7명이 공동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게 얼마나 힘들던지. 조장을 맡아주기로 했던 4학년이 조 결성 한 주만에 취업계를 내고 수업에서 나가버리면서 우리 조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되었고 그 이후로 나는 되도록 조별과제가 있는 수업은 듣지 않았다.
독일에서의 석사과정에서 딱 한번 조별 발표를 하게 된 때가 있었다. 내가 들은 수업은 "The Ethics of Killing"는 수업이었는데, Jeff McMahan이라는 사람이 쓴 동명의 책을 통해 수업이 진행되었다. 이 수업을 선택한 이유는 일단 "Ethics of Killing"이라는 제목이 흥미로웠고, 독일어가 아니라 영어로 된 교재로 수업을 했기에 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뒤쳐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한국이었다면 영어로 된 책을 읽는 수업을 선택하지 않으려 했을 텐데...). 첫 수업시간 교수는 학점을 위해서 한 파트씩 맡아서 발표를 해야 한다고 했고 2명에서 3명이 한 조를 이뤄서 한 장 (Kapitel)을 요약하고 토론을 할만한 질문을 만들어오고 책에 대한 비평도 해야 했다. 바로 책을 펴서 가장 만만한 장이 무엇인지 찾아봤다. 눈에 띄는 장이 있었다: Abortion. 한국에서 고등학교 논술이나 토론시간에 낙태와 사형제도는 단골 주제이기 때문에 친숙한 챕터였고 이 챕터에서 재빨리 손을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들 친구랑 수업을 듣다 보니 2명씩 짝을 지어서 손을 드는데 나 혼자 짝이 없었다. 나는 '낙태'장에서 바로 손을 들었고, 또 다른 한 명의 외국인이었던 그리스에서 온 여학생이 손을 들었다. 사실 속으로는 '독일인과 한 조가 되어서 독일어도 많이 물어보고 나중에 논문도 좀 봐달라고 해야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나에게는 당황스러운 결과였지만 어쩔 수 없는 결과이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고 그녀가 잠시 커피나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지금은 얼굴도 이름도 기억이 안나는 그녀는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문제가 있었다. 그녀는 나보다 독일어를 못했다. 꾸역꾸역 의사소통을 하고 파트를 나눴다. 나는 초반의 1-3 장을, 그녀는 4-5장을 발표하기로 했다. 발표까지는 몇 주간의 시간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녀와 나는 서로 발표 준비를 하고 발표전에 두 번 정도 만나서 합을 맞춰보기로 한 뒤 헤어졌다.
나는 일을 할 때 계획을 세세하게 짜는 편이다. 그래서 시험기간이나 발표 기간이 되면 대충 2주 전부터 조금씩 번역을 해 놓고 시간을 딱딱 나누어서 준비를 한다. 책은 매우 어려웠다. 나는 처음에 내가 영어를 못해서 어려운 줄 알았는데 당시 같은 기숙사에 살던 호주 친구에게 물어보니 그냥 단어가 미치도록 어려운 것이었다. 해야 할 내용이 많아서 대충 한 달 정도에 걸쳐 조금씩 번역을 했다. 내용은 매우 흥미로웠다. 나는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같이 발표를 하기로 한 친구는 계속해서 약속을 미뤘다. 처음에 월요일에 만나기로 했는데 갑자기 화요일에 만나자고 하더니 다시 수요일에 만나자고 하는 식이었다. 다시 한번 조별 발표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뭔가 엮이면 안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쿨하게 말했다:
나도 바쁘니까 그냥 만나지 말고 난 내 거 할 테니까 넌 너꺼해
타지에서 혼자 오래 살아남다 보니 이 정도 쳐내기는 일도 아니었다. 사실 하나도 바쁘지 않았다. 나는 발표 준비를 다 해놨기 때문에. 그러나 딱히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만나서 제대로 준비가 안될게 뻔했고 그럴 바에는 그냥 헬스장에 가서 쇠질을 한번 더하거나 운동을 더 하는 게 이득일 것 같았다. 그녀에게 발제지만 만들어서 보내면 내가 형식을 맞춰서 뽑아가겠노라 했다. 거기서 괜히 '넌 뭘 해라, 난 뭘 할게'이런 협상 같은 걸 했다간 마음만 피곤해 지기 때문에 그냥 내가 다 한다고 했다. 발제지를 보는데 정말 만났으면 시간이 아깝겠다는 생각을 했다.
발표 당일, 우리의 발표는 동일한 주제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평가는 극명하게 갈렸다. 당연했다. 투자한 시간이 달랐기 때문이다. 어차피 점수를 받는 발표는 아니었지만 나는 그냥 내 노력에 만족했다. 그 친구와 발표를 같이 준비한다고 만났다면 아마 구하는 게 아니라 나도 늪에 빠져 공멸했을 것이다.
아마 이런 상황이 되었겠지...
한국에 있었을 때는 정말 거절을 못했다. 그런데 혼자 살면서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다 보니 억지로 부탁을 들어줘서 서로 고통스러운 것보다 깔끔하게 거절해 내는 게 서로에게 좋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행히, 그 이후로 조별 발표를 할 일은 없었다. 조별발표는 괴롭다.
'가장 보통의 학생 > 유학일기 in 독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또 하나의 슬럼프와 또 하나의 견딤 (0) | 2020.10.30 |
---|---|
달빛이 환한 추석의 밤 (0) | 2020.10.02 |
외국어에 철벽을 치는 나의 뇌 (0) | 2020.09.26 |
자신의 관점을 잃지 마! (0) | 2020.09.25 |
사람이 독기를 품으면 못해낼 일이 없다 (0) | 2020.09.2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