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의 신분으로 독일의 대학에 들어가려면 독일어 어학시험 성적이 필요하다 (영어로 진행되는 과정은 영어 시험 성적을 요구하기도 한다). 학생들이 치는 시험은 보통 "테스트다프 TestDaF"나 "데에스하DSH"가 있는데 나는 DSH를 쳤다. 사실 독일에 올 때만 해도 무슨 시험이 있는지도 몰랐고 그냥 어학원에서 DSH를 준비한다고 하니까 한 거다. DSH는 Deutsche Sprachprüfung für den Hochschulzugang의 약자로, '고등교육을 위한 독일어 시험'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보통 이 시험은 독일의 대학에서 출제하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칠 수 없고 오직 독일에서만 볼 수 있는 시험이다. 점수는 DSH 0부터 3까지 있는데 0이 가장 낮은 점수고 3가 가장 높은 점수다. 보통 매우 높은 수준의 독일어 실력을 요구하는 소수의 과가 3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2만 따면 입학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DSH 2가 있어야 대학에 입학할 수 있으므로 0이나 1은 사실 거의 의미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물론 더 낮은 수준의 점수를 요구하는 과도 있다). 나는 DSH 2가 필요했는데 1) 듣기, 2) 읽기, 3) 문법, 4) 쓰기 그리고 말하기까지 평균이 67%를 넘어야 했다. 그래서 기초부터 DSH자격시험까지 1년 과정의 어학원을 등록하고 공부를 했다.
내가 다니던 곳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았는데 인터넷 커뮤니티에 사람들이 '한국인을 차별한다더라', '한국인은 시험에 합격하기 어렵다' 등등의 이른바 '카더라'가 많이 도는 학원이었다. 내가 경험해 본 결과 그 카더라를 쓴 사람들은 자기가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떨어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여기서 잠시 유학생활 꿀팁: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푸념 섞인 카더라는 믿을게 못된다. 자신의 경험만 믿어라). 각자 사정이 있겠지만 한국에서 빡쌘 고등학교 생활을 거쳐서 그런지 몰라도 나에겐 정말 좋은 학원이었고 선생님들도 실력과 열정을 동시에 갖춘 학원이었다. 학원을 다니면서 알게 된 사실은 이 학원은 국가에서 지원을 받아서 운영되기 때문에 가격이 다른 학원에 비해 저렴했고 강사들도 관련 학과를 전공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넘쳐나서 대기자가 줄을 서 있었고, 언제나 들어오고 싶은 사람이 넘쳤기 때문에 열심히 안 하는 사람은 끌어주기보다 그냥 알아서 떨어져 나가도록 두는 시스템이었다. 나도 몇 번의 고비가 있었지만 한 번도 시험에서 떨어지지 않고 마지막 단계까지 한 번에 합격했었다.
마지막 단계인 C1에서는 말하기 시험을 보고 DSH시험 2주 전에 쯔비셴테스트Zwischentest라고 해서 '중간점검'같은 시험을 본다. 다른 것들은 어느 정도 잘 받았는데 '읽기'에서 무려 44%를 받는 바람에 시험에서 떨어질 점수가 나왔다. 한 번도 떨어지지 않고 마지막 단계까지 올라왔던 나에게 중간시험에서 탈락할 점수, 그것도 반도 못 맞췄다는 건 정말 큰 충격이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당시의 나는 충격을 받고 좌절하기보다는 독기를 품었다. 당시 우리 반 선생님을 슈퍼에서 만났었는데 그 선생님이 나에게 2주 동안 잘하면 점수를 충분히 올릴 수 있다고 나에게 격려를 해줬다. 그래서 내가 그 선생님에게 말했다. '내가 보여준다'라고. 그리고 그 날부터 나는 독기를 품고 공부를 했다.
8시에 학원을 가고 12시 정도에 학원이 끝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면 2인분의 밥을 해서 점심을 먹고 나머지 절반은 도시락을 싸서 근처 대학 도서관에 갔다. 내가 살던 곳에서 대학까지 전철로 두정거장이었는데 교통비가 아까워서 항상 걸어 다녔다. 걸어 다니면 25분 정도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도서관에 가서 먼저 오답노트를 만들었다. 오답노트를 만들어보니 내가 틀리는 패턴이 보였다. 문제는 내가 한국에서 풀던 문제와 독일어 시험에서 묻는 것이 달랐다. 내 기억이 맞다면 문제가 다 주관식이라서 더 틀리기 쉬웠다. 이런 지문이 나왔다고 가정해보자: "A라는 도시에 T국가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기 위해 많이 유입되었고, 이로 인해 A도시의 인구가 1960년대에 급속도로 늘어났다". 그리고 만약 문제가 "1960년대에 A라는 도시의 인구가 늘어난 이유는 무엇인가?"라면, 한국에서 답은 보통 "일자리를 찾기 위해 사람들이 A 도시로 많이 몰려들었다"이다. 그런데 독일어 읽기 능력 평가에서 원하는 답은 "T국가의 사람들이 이주해서"였다. 이게 처음에는 이해하기 힘들어서 완전 다른 답을 썼는데 오답노트를 만들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했는데 답이 원하는 건 이거였다'라는 식으로 정리를 해보니까 어느 정도 패턴이 보였다. 그렇게 오답노트를 만든 뒤 무조건 머리에 익혔다. 한국에서 시험 봤던 내용을 완전히 잊고 독일의 시험 방식에 포커스를 맞췄다. 내 노트에는 항상 이 말이 쓰여 있었다
문제의 답은 네 생각이 아니라 선생의 생각이다
그렇게 공부를 하다가 6시가 되면 대학교의 도서관 옆 계단에 앉아서 혼자 밥을 먹었다. 외롭거나 힘들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정말 그때는 '떨어진다'라는 건 생각지도 않았다. 시험을 준비한 2주 동안 단 한 번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냥 '한다'라고만 생각했다. 10시가 되면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나는 할 수 있다'를 되뇌었다. 마지막에는 정말 너무 많이 봐서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는데 그래도 계속 봤다. 그렇게 시험을 쳤고 시험을 보고 1주일 뒤에 결과가 나왔다. 결과를 보러 학원에 가다가 슈퍼에서 마주쳤던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너 점수를 보고 내가 잘못 채점한 줄 알았어. 너 몇 점 받은 줄 아니? 98점이야.' 반에서 최고 점수였다. 덕분에 나는 시험에 합격해서 대학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운 좋게도 독일에 와서 1년 안에 어학 시험을 합격하고 대학까지 입학했다. 유학 생활의 첫 단추를 잘 끼웠다고 생각한다.
유학생활은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이다. 그것도 중간중간에 장애물이 많고 혼자서 뛰는 마라톤이다. 그러다 보면 마음이 흔들릴 때가 많다. 그때마다 나는 어학원을 다니던 그 시절을 떠올린다. 나는 독기를 품었다. 그리고 독기를 품으니 잡생각이 들지 않고 목표에만 집중하게 되었고 그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 요즘 유튜브에 특수부대를 나온 군인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고생의 종류는 다르겠지만 그들과 유학생이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힘들지만 포기 않고 끝까지 하는 것. 독기를 품으면 못할 건 없다. 오늘도 마음을 다잡는다.
'가장 보통의 학생 > 유학일기 in 독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외국어에 철벽을 치는 나의 뇌 (0) | 2020.09.26 |
---|---|
자신의 관점을 잃지 마! (0) | 2020.09.25 |
키스를 보는 사람과 키스를 찍는 사람 (0) | 2020.09.25 |
9학기 동안의 석사 과정이 내게 남긴 것 (2) | 2020.09.25 |
죽음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0) | 2020.09.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