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도 쓰긴 했지만 나는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에 친구들의 죽음을 경험한 편이다. 그 중 한명이 고등학교 시절 나의 첫 짝이었던 J이다. J와 나는 꽤나 금방 친해질 수 있었는데 당시 우리에게는 일본어라는 공통 분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유년기를 일본에서 보냈기에 일본문화에 나름대로 관심이 있었고 J도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노래들을 좋아했었다. 나는 J에게 노래를 추천해 주기도 했고 J는 CD에 추천할만한 애니메이션을 담아주었다. 덕분에 나는 '금색의 갓슈벨'이라는 만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게되었다.
J는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해서 통역이나 번역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 꿈을 가지게 된 데에는 J의 육체적인 불편함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J가 중학교 때 축구를 하다가 다리를 다쳤는데 시간이 지나도 상처가 낳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병원에 가보니 J의 몸에는 암세포가 자라고 있었다. 그래서 J는 수술을 했고 다리가 불편했다. 또래의 아이들처럼 운동을 하면서 놀지는 못했지만 J는 참 밝았다.
1학년 겨울 방학 때 J가 학교를 오지 않았다. 폐로 암이 전이되었다고 했다. 학교로 다시 돌아온 J는 전에 보던 J와 다를바가 없었다. 그런데 J 말로는 너무나 힘들었다고 했다. 자기가 살면서 많은 수술을 해 보았지만 폐를 잘라내는 것 보다 아픈 수술은 해본적이 없다고 말했다. 의사가 약을 잘못 넣어서 열이 40도 까지 올라가 죽을 뻔한 이야기도 해줬다. J는 의사를 절대 믿지 말라고 했다. J의 가르침과 내 경험을 토대로 나는 아직도 의사를 믿지 않는다.
J와 2학년 때 다른 반이 되었고 그 후로 많은 교류는 없었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물었던 정도였다. 당시에 나와 친구들은 J를 '머슬'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별명이 왜 그렇게 지어졌는지 기억은 잘 안나지만 나를 포함한 다른 친구들의 마음은 같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일부러 아이 이름을 천한 이름으로 지어서 저승사자가 빨리 안데려가게 한 것 처럼, 우리는 친구가 정말 근육이 붙고 건강해지길 바랐다.
나는 고3때 정말 방황을 많이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국의 입시제도를 버티기에, 특히 우리 학교 같이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학교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기에 나의 정신력이 부족했던 것 같다. 독서실에선 만화책을 빌려봤고 만화책을 보고나면 친구들과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러 갔다. 아이스크림을 핑계로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친구와 대화를 나누던 그 시간만이 내 힘든 하루의 유일한 안식이었다. 고3 때 J는 학교에 못나오는 날이 많았다. 원래 암이라는게 무서운 건 전이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통 치료 후 5년간 재발을 안하면 완치라고 하는데 5년을 얼마 안남기고 전이 된 암들이 계속해서 전이 된 것이다. 수능시험을 보기전에 학교로 온 J에게 나는 고등학교 생활이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그러자 J가 말했다
나는 한번이라도 정말 온전히 공부해봤으면 좋겠다.
이 말은 나에게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는데, 내가 하기 싫어하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정말 한번이라도 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할만한 절실한 일일 수 있다는게 놀라웠다. J는 수능을 잘 보라는 이야기를 남기고 학교를 떠났다. 그때까지만해도 그게 J의 마지막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느덧 수능이 끝나고 수능을 제대로 망친 나는 지방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했다. 서울에서만 평생 살다가 지방으로 내려가니 모든 것이 낯설었다. 지방에가서 가장 놀랐던 것은 '시내'와 '시내가 아닌 곳'의 엄청난 차이였다. 서울도 시내가 있다. 그런데 서울에선 시내가 아니더라도 놀 것, 할 것이 너무나 많기에 '시내에 나가자'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의 대학은 말그대로 논밭이 있는 시골에 위치해 있었고 이 생활이 너무 답답했다 (졸업할 때 쯤엔 너무 행복해서 서욿을 가지 않았지만 1학년 때는 그랬다). 금요일이 되면 바로 서울에 가서 친구들을 만났다. 마치 군대에서 외박을 나가는 느낌이었다. 내가 대학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있었음 무렵, J에게서 연락이 왔다. J가 대학생활은 어떠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과제도 많고 재미도 없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한참동안 내 푸념을 늘어놓은 후에야, 나는 J의 안부를 물었다. J는 수술하고 잘 쉬고 있다고 말했다. 병원에 한번 놀러가겠다고 했는데 곧 퇴원할테니 퇴원하고 만나자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 J가 누군가를 만나는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화를 나누고 2주정도 지났을까. 수업을 듣고 있는데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J가 죽었다고 했다. 평일이었지만 수업이 끝나자마자 서울로 올라갔다. 장례식장에는 고등학교 친구들이 모여있었다. J의 영정을 보니 그냥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얘가 왜 여기 있지?
친구의 죽음을 받아들이기에 그때의 난 너무 어렸다. 그리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내가 대학생활이 재미없다는 푸념을 늘어놓았던 그 시기에 다른 친구와 J가 문자를 주고 받았는데 J가 당시 매우 힘들어했다는 이야기였다. 당시 J는 살이 너무 많이 빠져서 자기가 이제 곧 죽는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친구는 나보다 훨씬 더 힘들게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있었는데 나는 거기서 대학생활 재미없다는 소리나 해댔다니! 10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나 후회스러운 대목이다. 만약 내가 거기서 내 이야기를 하기보다 J의 말에 귀기울여줬다면, J는 나에게도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J에게 내 삶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았을 때, 나는 내가 가장 힘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 고민은 당시에는 커 보였을지 몰라도 지나고나면 생각도 나지 않는 그런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 이야기를 하느라 J의 말을 들어줄 기회를 놓쳤다. 그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나에게는 일상에서의 힘듦이 고민이었다면, J는 나에겐 당연한 일상을 누릴 수 없음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에게 당연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정말 얻고싶은 소중한 것일 수도 있겠구나. 친구가 알려주고 간 내용을 생각할 때마다 친구가 생각난다.
J야, 네가 그렇게 하고 싶어했던 공부를 나는 아직까지 질리도록 하고 있구나. 그래도 네가 알려준 덕에 항상 감사함을 잊지 않고 살고 있다. 고맙고, 더 이상 아프지 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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