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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보통의 학생/학창시절 in 한국

철학과 가는 게 뺨 맞을 일은 아니잖아요?

by 별_ 2020.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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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학에 가서 철학을 전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한 선생님이 추천해 주셨던 철학책을 읽고 뭔가 재미있어 보여 이것저것 읽다 보니 어느새 내 꿈은 독일에 가서 철학을 공부하는 게 되어 있었다. 철학과를 가겠다고 마음먹은 이후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철학과 가서 뭐 먹고살래?"

라는 질문이었다. 그럴 때면 "경영학과 나오면 CEO 되냐?"라며 웃어넘겼다. 철학과에 진학하고 나서도 비슷했다. "졸업하면 철학원 차릴 거냐?"는 질문부터 손금을 봐달라 거나 타로점을 봐달라는 사람도 많았다. 긍정적인 이야기라고는 '철학은 모든 학문의 기초다. 그러니 꼭 배워야 한다'는 뜬구름 잡는 소리뿐이었다. 다행인 것은 우리 부모님은 자식이 철학 공부한다는 것을 말리기보다 지지해주셨다는 점이다. 이 글은 한국에서 학부생 시절에 겪었던 황당하면서도 슬픈 경험에 관한 이야기다.

 

군대에 다녀와서 복학했던 첫 학기. 2학년까지 마치고 군대를 갔던 나는 3학년으로 복학을 했고, 오랜만에 맞는 대학생활과 전공 공부에 대한 기대감으로 잔뜩 들떠있던 시기였다. 우리 학교는 1학년 때 학부로 시작을 하고 2학년 때부터 전공 선택을 하고 전공 수업을 듣는데, 인문학부로 들어온 학생들은 1학년 때 무작위로 인문학부 소속의 각 전공 소속으로 자신의 분반을 배정받는다. 철학과는 규모가 크지 않은 덕분에 과의 단결력과 구성원 간의 유대감이 끈끈한 학과였고, 소수정예 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소수'의 자부심을 가진 학과였다. 그래서 몇몇 학생들은, 철학과에 갈 생각이 없었다가 학부생 때 철학과 소속으로 생활을 해 본 뒤 마음을 바꿔서 철학과로 들어오기도 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과 사무실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사람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고, 교수님이 전화를 끊은 뒤 우리는 우리에게 벌어진 황당한 일에 대해 듣게 된다. 한 학생이, 오리엔테이션에서 선배들과 전공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고 철학과에 가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집에 가서 부모님께 '철학과에 가겠다'라고 했는데 아버지가 노발대발을 넘어서 뺨까지 때려가며 뜯어말렸다고 한다. 결국 그 학생의 아버지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과 사무실에 전화를 걸고 교수를 바꿔달라고 한 뒤

 

도대체 애한테 어떤 소리를 했길래 애가 철학과 간다는 소리를 하냐!

라며 화를 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우리 과 사람들은 한동안 기가 차서 말도 못 하고 쓴웃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아이의 아버지 눈에 도대체 철학과가 뭐하는 곳으로 비치는 건지 궁금했다. 심지어 이 분은 고등학교 선생님이셨는데 이 선생님 반에서 진학 상담할 때 철학과 간다고 하면 뭐라고 할까? 그 아이는 그 후로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과로 진학했다는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무튼 그 아이가 철학과로 진학하지 않았다는 건 확실하다. 도대체 철학과 간다는 게 뭐 그리 잘못한 일이어서 뺨을 맞아야 했던걸까? 이 사건 이후로 나는 철학과 간다고 했을 때 뺨 안 때린 부모님께 감사하게 되었다.  

 

철학과를 가든 경영학과를 가든 특정 학과를 나왔다고 해서 꼭 그 전공을 살려서 취업을 하거나 전공에 따라 삶을 결정할 필요는 없다. 전공은 전공일 뿐 삶이 아니다. 철학과를 나온 내 주변의 선/후배들의 경우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일들을 하며 각자 잘 살고 있다. 물론 철학과를 나와서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철학과를 나왔기 때문에 힘든 삶을 사는 건 아니다. 삶은 원래 다 힘들다. 뭐 백번 양보해서 철학과를 나와서 좀 힘들게 산다고 치자. 그렇다고

 

철학과 가는 게 뺨 맞을 일은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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