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1학년 때 좀 특이한 수업이 있었다. 수업의 제목은 '나를 찾아 떠나는 철학 오디세이'.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해서 교수님과 편하게 이야기 나누는 수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학점짜리 교양수업이라 시험은 보고서로 대체되었는데, 그 보고서는 '40살까지의 인생을 설계해보기'였다. 대학교 1학년 때의 나는, 수학이라는 저주스러운 과목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과, 드디어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해 볼 수 있겠다는 착각으로 인한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철학이라는 어려운 학문을 전공자가 아닌 사람들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글을 쓰는 것이었다. 보통 교양서적이라고 나온 책들을 보면, 교양서적임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는 생소한 용어들로 가득했다. 물론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뜻을 온전히 전달하고자 했던 노력의 일환이었겠지만, 너무 어려운 글은 재미를 잃게 된다. 그리고 너무 쉽게 쓰인 책들은 잘못된 정보들이 너무 많아서, 뭔가 그 중간지점쯤에 있는,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면서도 일상에서 접할 수 있을 법한 쉬운 예들을 통해 설명할 수 있는 강의나 책을 쓰는 게 내 나름의 목표였다. 나는 내가 철학을 전공하겠다고 결정했던 고등학교 1 학년 때부터, 유학을 가겠다는 일념으로 돈을 모았기에, 졸업하면 대학원을 가고, 그 뒤에 유학을 가서 몇 살까지 뭘 하겠다 이런 식으로 계획을 짰다. 과제를 제출하고 선생님과 상담을 했는데, 그때 선생님이 해주셨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이 중에 몇 퍼센트나 계획대로 될 것 같냐?
이 말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저 말만 들으면 굉장히 부정적인 뉘앙스로 들리는데, 선생님이 말씀하신 맥락에서 이해해 보면, 삶이 꼭 네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무엇이든 준비는 해 놓아야 한다. 그러니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고 그것에 좌절하지 말고, 당연한 일이니 또 다른 기회를 찾고, 그 기회가 오기까지 이것저것 준비해 놓으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말은 기억에 남아있었지만 내가 쓴 인생 계획에 대한 과제는 잊은 채로 졸업을 했다. 너무 비싼 등록금이 부담되어서 장학금을 받고 조기졸업을 하려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고1부터 대학 졸업까지, 이것저것 하면서 천만 원을 모았다. 그 천만 원으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고, 해외에서 내가 혼자 힘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워홀러의 신분으로 있다가, 유학생이 되었다.
어학을 중반쯤 마쳤을 때 대학교에 지원을 했고 어학 시험을 통과하는 조건으로 조건부 합격을 했다. 가고 싶은 학교가 있어서 한 군데만 지원했는데 운 좋게도 좋은 결과를 얻었다. 어학 시험을 보기 전에 집 계약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겠다고 했다. 나 나름대로는 배수의 진을 친 것이었다. 어학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집도 없어지고, 대학도 떨어지고, 모든 것이 꼬이게 된다고 생각하니 더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다. 하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고비가 왔다. 전공을 공부하러 왔는데 전공 공부는 시작도 못하고 어려운 문법만 배우고 있으니 흥미를 잃었다. 본시험을 2주 남기고 본 모의고사에서 나는 불합격을 했다. 합격을 위해서는 평균 67%의 점수가 필요했는데, 읽기를 44%를 받아서 도저히 통과할 수가 없었다. 벼랑 끝에 몰리면 사람이 초인적 힘을 발휘한다고 했던가? 그때부터 2주 동안 나는 오답노트를 만들며 공부했다. 집에선 집중이 안 되는 것 같아서 어학원 수업이 끝나면 항상 지하철로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대학의 도서관에 갔다. 돈을 아끼려고 걸어 다녔고, 도시락을 싸들고 가서 밤까지 공부했다. 밤 11시에 집에 돌아오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왜 점수가 그렇게 낮게 나왔나' 고민했다. 결국 시험에서 읽기를 98% 받았고 어학 시험에서 합격할 수 있었다.
이사를 앞두고, 방을 정리하면서 대학시절 썼던 글들을 정리하다가 폴더 깊숙한 곳에서 내가 과제로 제출했던 '40 살까지의 인생 계획표'를 발견했다. 그 글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내가 거기에 'XX이라는 도시로 간다'라고 써 놓은 것이다. XX이라는 도시는 지금 내가 공부하고 있는 곳인데, '대학교 1학년 때 내가 무슨 근거로 여길 간다고 했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쩌다 보니 생각한 대로 살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곳에 와서 고등학교 때부터 꿈이 었던 국어 교사의 꿈도 이뤘었고, 철학을 쉽게 알리고 싶다는 꿈대로 가르치는 일 비슷한 것도 하고 있다. 심지어 하고싶던 야구도 하면서 산다. 물론 아직도 인생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훨씬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소원을 간절히 빌면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만큼 간절하면 뭐든 해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한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해서 꿈을 가지고 공부를 해보려 한다. 그렇게 또 정신없이 구르다가 문득 정신 차려보면 '와, 생각한 대로 살고 있네'라는 기분 좋은 감탄을 할 수 있는 날이 또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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