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를 다니는 학생들은 누구나 한번쯤 '너 점 볼 줄 아니?'라는 질문을 들어봤을 것이다. 이 질문은 어느 정도 오해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나 역시 전공 수업 때 점을 보는 법을 배우고 점을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졸업을 앞두고 마음이 뒤숭숭하던 때였다. 당시 나는 '주역'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중간고사가 끝난 뒤 잠시 쉬어가는 의미로 주역 점을 보는 법을 배우고 직접 자신의 미래를 알아보는 시간이 있었다. 주역점은 음과 양으로 이루어진 8괘 두 개를 통해 나오는 64가지의 괘 효상을 읽어내는 것이다. 한 괘 한 효는 어떤 상황 아래서의 인간의 행위가 다른 효 즉 다른 인간과 어떤 관계 맺음을 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기에 64 괘는 인간의 행위를 64가지 유형의 상황으로 구별한 것이다. 주역점을 위해서는 물질적 도구도 중요하지만 경건하고 원하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했기 때문에 교수님은 자신이 미래에 원하는 것을 떠올리면서 괘를 뽑으라고 하셨다. 당시 MT에서 남은 나무젓가락이 과방에 많이 남아있었어서 64개의 나무젓가락으로 각자 점을 봤다. 당시 나의 가장 큰 고민은 '내가 앞으로 공부를 계속해도 될까?'라는 의문이었기에 공부를 계속하는 나의 미래 모습을 그려보며 괘를 뽑았다. 무슨 괘가 나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남들과 너무나 다른 꽤나 희귀한 괘가 나왔다는 점이다. 교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 어떤 괘가 나왔는지 알려주고 무엇을 생각하고 뽑은 것인지 물어본 뒤, 괘가 가지는 의미를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다. 그리고 교수님이 나에게도 역시 '무슨 생각을 하고 괘를 뽑았나요?'라고 물어봤다. 나는 '제가 공부를 하고 싶은데 공부를 과연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계속해도 되는지가 궁금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교수님은 어딘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시더니 매우 모호한 대답을 하셨다:
10년 뒤에 XX 씨를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네요.
내 괘 해석은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어느덧 내년이면 벌써 주역점을 본 지 10년째가 된다. 아직도 교수님이 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생각했던 대로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어제는 지도교수와 내 박사논문의 주제에 대해 면담을 했다. 내 원래의 계획은 박사과정 1년에서 2년은 그냥 책만 읽고 주제만 정한 다음 매 학기 석사논문 하나를 쓴다는 생각으로 대충 2년을 더하면 박사논문을 작성할 수 있지 않을까 정도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정말 3학기 만에 어떻게든 논문 주제를 정했고 교수의 긍정적인 평가를 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내 논문을 완성해내는 일이다. 코로나로 학교를 갈 수 없기에 교수와의 면담은 ZOOM을 통해 진행되었다. 처음 10분 정도 교수는 내 논문의 방향에 대해 조언과 피드백을 해줬고 다음 10분은 개인적인 질문들을 했다. 나의 지도교수는 항상 까먹지만 (워낙 사람을 많이 만나다 보니) 나를 만나면 항상 '어떻게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도 그럴 것이 가뜩이나 중간에 박사를 관두는 사람이 많은데 경제적인 부분이 해결되지 않으면 중간에 관둘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가르치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물론 이 수입이 노동에 비해 큰돈이긴 하지만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나는 되도록 나의 학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기에 이런 일을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물론 지도교수는 금방 까먹을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내 앞으로의 직업적인 목표에 대해 물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조목조목 대답했다. 교수는 좋은 생각이라고 하면서 일단 내 박사가 끝나면 다시 한번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답했다 (물론 이것도 금방 까먹을 것이다).
10년 뒤가 아니라 10초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게 인생이다. 하지만 진실되게 전력을 다해 무언가 꿈꾼다면 어느 순간 구르고 구르다가 그 목표에 가까워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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