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면 초, 중, 고뿐 아니라 대학교에서까지 감사한 선생님들을 참 많이 만났다. 그런데 오늘은 감사한 선생님 대신 선생님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한 인간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그는 내 고등학교 1학년 담임이었다.
우리학교의 선생님들은 다양한 별명들이 있었다. 점이 많은 선생님은 '칙촉', 쟤 때문에 물리 포기라는 뜻을 가진 '제물포', 온갖 더러운 짓을 하고 다니던 '추잡이' 등등... 그리고 우리 담임은 걸리면 죽는다 라는 뜻의 '에이즈'였다. 모든 고등학교가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리 학교는 특이하게 대학처럼 OT (오리엔테이션)가 있었다. OT에서 우리가 배운 것은 육군 사관학교에서 쓰는 경례구호. 학기가 시작하기 전부터 교사에 대한 복종을 교육받은 우리는 마치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나 나올법한 학교생활을 했다.
나와 담임의 악연은 개학 첫날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우리 학교에는 '0 교시'라는 게 있어서 8시에 수업이 시작했는데, 우리 반은 7시 40분까지 전원 자리에 '착석'해 있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그런데 첫날, 수업이 8시라고 생각했던 나는 5분 정도 지각을 했다. 교실의 아이들은 숨소리도 안 들리게 책을 보고 있었고 담임은 뒤늦게 들어오는 나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넌 뭐냐 이 XXX야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담임이 내게 물었다
"몇 번이야?"
우리 반은 번호에 맞게 자리를 배치했었고 나는 당시 10번이었다. 그래서 대답했다
"10번이요"
그러자 담임이 화를 냈다.
"뭐? 요? 이 새끼 봐라... 너 미쳤냐?"
순간 황당하여서 '뭐가 미쳤다는 거지?'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우리는 OT 내내 선생들에게 '-요'가 아니라 '다' 나 '까'로 말해야 한다고 교육받았었다. 군대에서나 하는 말투를 고등학생에게 쓰라고 했던 것이다. OT 때도 주먹으로 아이들의 얼굴을 갈겨대는 것을 봤기에 등 뒤에선 식은땀이 흘렀지만 다행히 담임은 나를 때리지는 않았다. 그냥 나에게 "멍청한 새끼... 자리에 앉아서 공부나해!!!"라고 말했을 뿐이다. 맞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을 때쯤, 담임은 "떠들다 걸리면 내가 보여줄게, 본보기가 뭔지"라는 살벌한 말과 함께 자리를 떴다. 담임이 무서워서 읽히지도 않는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앞자리에 앉은 애가 말을 걸었다. 나는 이야기하기가 무서웠는데도 그 친구는 뒤까지 돌아보며 내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나는 겁을 먹어서 그 친구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대답을 했다. 그때였다. 담임이 나무로 된 문을 힘껏 열며 말했다:
너 나와 이 XXX야
내 눈은 책을 보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내가 아닌 줄 알 앗다. 담임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야!!!". 고개를 살짝 들고 담임을 봤다. 그의 눈은 분명 나를 향하고 있었다. "저요?"라고 묻자 담임이 말했다 "그럼 너지 이 XXX야. 넌 뒤졌다". 글로 쓰면서도 이게 선생이 학생에게 하는 말인가 싶다 (물론 이것도 많이 순화한 것이다). 담임은 나와 그 친구를 앞에 나와 엎드리게 한 뒤 있는 힘껏 매질을 시작했다. 나는 맞으면서 '몇 대 때릴까? 세대? 다섯 대? 설마 열대 따리진 않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에 대한 경고였을까? 담임은 정확히 18대를 때렸다. 첫 날부터 나는 에이즈에게 찍혀버렸다.
우리 학교는 매주 월요일마다 '형성평가'라고 해서 수학과 영어 시험을 번갈아가며 봤었다. 담임이 토요일에 숙제를 냈다. "1과부터 5과 까지 단어를 외워라.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공책에 20번씩 써서 검사를 받아라. 안 해오면? 니들은 변사체가 된다" 담임은 변사체가 된다는 말을 자주 썼다. 도대체 저 인간의 머리에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했다. 주말엔 국가대표 축구경기가 있었고 나는 축구를 보며 단어를 외웠다. 근데 다행스럽게도 책의 첫 부분이라 그런지 쉬운 단어뿐이었다. 쉽게 외워지지 않는 단어 두 개만 각각 20번 썼다.
월요일부터 교실에는 살벌한 기운이 감돌았다. 담임은 공책을 검사해서 숙제를 안 한 애들을 쥐 잡듯이 패고 있었다. 알고보니 다른 애들은 공책 5~6페이지를 단어로 꽉 채워왔다. 내 숙제는 반페이지도 안되었다.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가 이런 심정이었을까? 내 짝이었던 9번 친구는 거의 모든 단어를 써왔고, 다음엔 10번, 내 차례가 왔다: 담임은 짝과 비교되는 내 공책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허허... 넌 또 뭐냐? 이걸 공부라고 했냐?" 나는 최대한 '-요'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다른 건 다 외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담임이 "이걸 다 외웠다고? 내가 시험 봐서 못 외우면 넌 죽을 줄 알아라"라고 하며 즉석에서 시험을 내기 시작했다. 변사체가 되고 싶지 않아 엄청나게 집중을 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첫 단어는 'cultivate'였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약 10개 정도의 단어를 대답해냈다. 그러자 담임의 표정이 바뀌었다. "들어가". 내 다음 친구도 나처럼 시험을 봤다. 그 친구는 대답을 못했고 엉덩이를 30대 맞았다.
그 날부터 담임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바뀌었다. 담임은 성적으로 아이들을 차별했다. 나는 공부를 잘하지 않았지만 못하지도 않았기에 그 이후로 담임에게 맞지 않았다. 그러나 성적이 안 좋은 애들은 수도 없이 맞았다. 엉덩이만 맞으면 다행이었다. 한 번은 수행평가 점수가 낮게 나와서 반 전체 분위기가 안 좋았는데 종례 시간에 한 아이가 웃었다. 담임이 웃긴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담임이 그 아이를 나오라고 하더니 주먹으로 얼굴을 막 때렸다. 물론, 그 아이만 웃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수행평가에서 30점을 받았었고 담임은 만화 '더 파이팅'에 나오는 댐프시롤 처럼 그 아이를 때렸다. 키가 165정도에 몸무게는 90KG가 넘던 아이는 한대 맞을 때 마다 뒤로 밀려났다.
이게 뎀프시롤이다.
체벌은 때로는 주먹으로, 때로는 하키 스틱으로 계속되었다. 교무실에 끌려가면 바지에 물을 적신 다음에 하키 스틱으로 맞았다. 맞고 온 아이들은 의자에 앉을 때마다 고통스러워했다. 여기에 다 적을 수도 없을 정도로 우리는 정말 많이 맞았다.
끊어질 것 같던 담임과의 악연은 방학을 앞두고 다시 이어졌다. 당시 방학 때 아빠가 일본에 출장을 간다고 하셔서 3박 4일 동안 같이 일본에 따라가기로 했었다. 오랜만에 일본에 있는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기뻤어야 했지만 두려웠다. 방학 때 우리 반은 자율 (이라고 쓰고 강제라고 읽는다)적으로 보충수업을 했는데, 일본에 가려면 이 수업을 빠져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담임에게 말하면 욕먹을게 뻔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이야기해야 했다. 무단으로 결석하면 정말 변사체가 될 수도 있었기에. 담임은 돈도 안 내면서 애들이 먹고 남은 급식으로 점심을 해결했는데, 그나마 밥을 먹을 때는 기분이 좋을 것 같아서 이야기를 꺼냈다. "선생님... 저 방학 때 아버지 출장 겸 잠시 일본을 다녀오려고 합니다, 학교에서 하는 공부도 좋지만 여행에서 배우고 오는 것도...". 그 이후 에이즈는 반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 얘들아, 이 XX가 남들 다 공부하는데 지 혼자 일본 가서 놀고 온단다. 이런 XXX는 왕따를 당해야 되는 거 아니냐?
난 이 대답을 잊을 수가 없다. 반 아이들에게 왕따를 종용하는 담임이라니 하하. 물론 왕따 당하기엔 우리는 너무 친했다. 에이즈라는 공공의 적에 대항하는 백혈구같은 전우애가 있었다. 결국 나는 일본을 다녀왔고, 엄마가 학교에 가셔서 선물을 주고 난 뒤에야 에이즈는 화가 풀렸다. 일본에서도 난 불안함에 떨어서 제대로 놀지 못했다. 당시 그는 우리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하하... 이거 뇌물입니까? 그럼 고맙게 받겠습니다"
에이즈의 폭정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딱 하나였다. 1년을 버티는 것. 그 후에도 에이즈는 '선도'라는 명목 하에 일방적인 폭력을 행사했다. 새로 추가된 룰이 있다면 지각하는 사람은 무조건 김밥천국에서 김밥을 사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참치김밥을 사 오는 사람은 주먹질을 당했고 (참치에 알레르기가 있다고 했다), 김밥을 안 사 오면 현금 2천 원을 뜯어갔다 (쓰면서도 비현실적인데 실제로 있던 일이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나는 한 번의 지각을 했고, 김밥 대신 보온병에 커피를 타갔다. 보온병은 당연히 돌려주지 않았다. 나도 그 인간의 더러운 입이 닿은 보온병을 돌려받을 생각은 없었다.
아직까지 이런 인간이 선생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른 학교에도 이런 인간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중요한 건 이런 바이러스 같은 선생들 때문에 고통받는 아이들이 더 이상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나의 담임이었던 에이즈, 부디 남은 삶은 더 추잡하게 늙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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