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는 선생님의 차에 타게 된 적이 있었는데 내가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고 하자 그 선생님이 내게 이런 말을 해 줬다:
박사를 하려면 아무것도 기대를 말아야 해요. 그걸로 뭘 얻는다는 생각을 하지 마.
박사를 시작하기 전에는 잘 몰랐는데 막상 시작하고 나니까 참 공감이 가는 말이다. 브런치뿐만 아니라 많은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박사과정의 위험성 (?)'에 대한 글들이 많다. 그 위험성에는 지도교수와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포함되지만 또 한 가지 많이 언급되는 내용은 '석사도 했는데 이대로 끝내긴 아까우니 공부나 좀 더 해볼까?'라는 생각으로 박사과정에 들어가면 후회하게 된다는 조언이다. 물론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 공부를 하든 말든 자기 선택인데 다른 사람이 왜 참견을 하고 훈수를 두냐?'라고. 그러나 나 역시 경험하고 나니 저 말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충고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의 인생에 주제넘게 충고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 글은 그냥 내 넋두리다. 이 글에서는 1) 박사과정은 석사과정과 무엇이 다르며, 2) 어떤 점에서 어려움이 있을까? 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아, 여기서 말하는 박사과정은 나의 경험을 토대로 한 인문계의 박사과정을 의미한다. 이공계나 다른 분야는 모르기 때문에 이 글의 주제에서 제외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석사와 박사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연구 주제의 '독창성'에 있다. 석사 논문도 물론 본인의 석사과정 속에서 이뤄낸 공부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보통 석사논문에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석사논문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된다. 석사논문은 그래서 박사논문에 비하면 덜 독창적이어도 학문적 글쓰기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면 통과되는 경우가 많다. 석사논문을 박사논문처럼 쓰려고 하다 보면 그 사람은 결국에 박사가 되지 못하고 '척척 석사'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그런 논문은 보통 완성될 수 없는 '유니콘'같은 논문이거나 완성된다고 하더라도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논문이 탁월하기도 독창적이기도 하면 좋겠지만 결국 논문을 작성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의 논문을 완성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논문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과의 타협'도 중요하다. 그런데 박사논문은 다르다. 박사는 기존에 없던 시각, 즉 '나만의 것'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 기존의 연구를 토대로 '나만의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자기만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박사논문이라는 형식을 통해 옳다고 증명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박사과정이다. 이 과정을 성공적으로 해내면 논문에서의 테제가 하나의 '이론'이 된다. 만약 어린 시절부터 주입식 교육과 남들이 시켜야 하는 공부에 익숙해져 있다면 박사과정에 들어가서 당황하기 마련이다. 박사과정은 입만 벌린다고 있다고 해서 결과물이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어떤 나무에 올라갈지, 어떻게 올라갈지, 그리고 어떤 열매를 딸 지, 그 열매를 먹을지 말지, 모두가 자신이 결정하고 해내야만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박사학위는 한 명의 독자적인 학자로서, 자신만의 주제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에게 수여되는 일종의 증명서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박사학위는 경제활동에서의 이익을 보장해주는 수단이 아니다.
얼마 전에 지인과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에 박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인생을 건 도박을 하는 거나 다름없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도박은 리스크가 아주 큰 도박이기도 하다. 박사학위를 딴다고 하면 보통 30살이 넘는데 그때까지 회사에 취직하거나 자기 일을 하는 사람만큼의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게다가 오랜 기간 학교를 다녔다는 사실은 직업을 구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오히려 디메리트로 작용한다). 박사를 몇 년 동안 하다가 중간에 그만두면 물론 그 기간 동안 자기 자신이 공부한 것이나 경험한 것들은 남겠지만 그건 자기 자신만 아는 것이지 사회에서는 어떠한 증명도 되지 않는다. 박사가 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군대에서 전역하면 무언가 해낸 느낌이 든다. 하지만 예비군 훈련을 가보면 나 말고 다른 사람도 다 병장으로 전역한 예비역들이다. 박사도 비슷하다. 박사가 되고 나서 대학에 강의를 하러 가보면 수많은 강사들이 다 박사다. 특히 교수가 되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렵다. 교수가 되는 것은 그 사람의 학업적 능력이 어떤지와는 별개의 문제이기에 자신이 유명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좋은 논문을 썼다고 해도 그 자체가 교수직을 보장하지 않는다 (낭중지추들은 모든 것을 뛰어넘어 교수가 되기도 하지만 중요한 건 나는 낭중지추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박사과정을 한다는 건 그 사람의 인생의 큰 부분을 걸어야 하는 도박과 비슷한 것이다. 그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서 박사학위를 취득해도 보험도 되지 않고 패스트푸드 알바보다도 보장되는 게 없는 강사생활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강사 중에는 대학 강의뿐 아니라 입시학원이나 아예 학업과 관련 없는 일을 투잡으로 하는 분들도 있다). 물론 세상 그 어떤 일도 쉽지 않고 보장된 것은 없다. 하지만 박사가 되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박사는 말 그대로 하이리스크 로우 리턴의 투자다. 브런치의 한 작가님이 써 주신 글을 통해 알게 된 기사에서 읽었던 박사과정생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다:
Zeit zu Zeit fühle ich mich wie ein Seiltänzer mit Höhenangst (때때로 나는 내가 마치 고소공포증을 가진 줄타기꾼처럼 느껴진다)
줄 위에 올라갔으니 결국 건너지 못하면 떨어지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언제나 두려움에 덜덜 떨지만 줄에서 내려오려면 어찌 됐든 목적지만 보고 나아가야 하는 게 박사과정생들이다. 올라온 게 아까워서 중간에 뛰어내리는 것도 쉽지 않고 뛰어내리면 결국 낭떠러지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박사를 '내가 석사까지 했으니까' 혹은 '나는 무조건 대학교수가 될 거니까'라는 생각으로 시작한다면 큰 실망과 좌절을 맛보기 쉽다. 박사과정에 임하는 가장 좋은 동기는 그래서 단순히 '자기만족'이 아닐까? 교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자기 자신의 학업적 만족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 그런데 이렇게 공부를 하더라도 결국 현실 (이라고 말하고 '돈'으로 읽는다)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그래서 장학금을 받거나, 혹은 어느 정도의 수익을 보장해 줄 수 있는 학위과정이 아니라면 중간에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 나는 장학금을 받지 못하는 박사과정 생이다. 거의 대부분의 장학금은 박사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회가 돌아간다. 나 같이 석사부터 유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기회가 거의 없다. 있는 기회는 보통 자국민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사람이 나에게 뭐하냐고 물어보면 나는 나를 학생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학생은 직업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학생이라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생이란 타이틀은 나를 설명하는 수식어일 뿐 내게 빵 한 조각, 쌀 한 톨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까지 공부를 이어나갈 수 있을까? 4평 남짓한 방에서 언제까지 이렇게 궁핍하게라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독일어를 정말 못하고 박사 과정생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의 민망한 발표를 했던 한 외국인 동료가 국가에서 5년간 장학금을 받는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이 나이 먹도록 공부하고 있는 삶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감이 들었다. 나를 위해서 하는 공부는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아직 알 수 없지만, 결국에 내가 대답해야 하는 물음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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