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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일에서 야구를 한다

마음의 평온을 가져다주는 마법의 주문

by 별_ 2020.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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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생 시절. 독일에서 공부하고 오신 교수님이 이런 말을 하셨다.

논문은 내 수명을 바쳐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논문을 쓰면서 내 머리엔 항상 이 말이 맴돌았다. 그만큼 공감이 갔기 때문이다. 글이 써지는 날은 아주 기분이 좋다.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고 '이제 곧 완성할 수 있겠지'라는 희망이 보인다. 그런데 논문이 안 써지는 날이 오면 도저히 논문을 완성해낼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인다. 이러한 불안이 하루가 아니라 일주일 넘게 지속되면 정말 내 수명이 폭탄의 심지처럼 타들어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슬럼프를 끊어내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면서도 매우 힘들다. 일단, 버티는 시간이 필요하다. 부정적 감정을 끊어내려고 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오히려 생각에 빠지게 되기 때문에 먼저 그 부정적인 감정을 온전히 느끼면서 그 마음의 부담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버티다 보면 어느샌가 내 마음은 앞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때 앞으로 조심스레 한걸음 내딛는 것이다. 꼭 앞으로만 갈 필요는 없다. 비틀거려도 한 걸음 내디뎠다면 그것으로 나 자신을 위로하고 토닥여줄 수도 있어야 한다.

내가 야구를 시작하고, 첫 시즌에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 

 du bist zu hektisch 
 너는 너무 조급해

야구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타이밍'이다. 그런데 나는 무조건 강하게 하려고 했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만 하다 보니 마음이 앞서서 공이 오기도 전에 배트를 휘둘러서 정타가 나오지 않았다. 한 가지 흥미로웠던 것은 배팅 연습 때는 내가 팀에서 가장 멀리 공을 날리는 그룹에 속해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합에만 가면 투수가 공을 던지기도 전에 내 몸은 이미, 아직 오지도 않은 공을 마중 나가고 있었다. 수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연습에서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시합에만 들어가면 일단 나에게 오는 공을 잡기도 전에 주자를 봐서 속칭 '알까기' (공이 다리 사이로 지나가는 실수)를 하거나 1루 베이스에 달려가고 있는 주자를 보면 '빨리 던져야 하는데'라는 마음에 들쭉날쭉한 릴리스 포인트로 공을 날려서 공이 1루수를 넘어가기 일수였다. 그럴 때마다 친구들이 나에게 걸어준 마법의 주문이 있었다:

Locka bleiben

 

Locka는 독일어 형용사인 locker를 소리 나는 대로 쓴 것이다. locker는 '느슨한'이라는 뜻이 있고 bleiben은 '머무르다'라는 동사니까 'locker bleiben'은 의역해서 '침착해' 정도의 뜻이 된다. 이 주문은 매우 효과가 있었다. 내가 성급해지려고 할 때마다 친구들은 나에게 이 주문을 걸어줬다. 그러면 나는 마음속으로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셋이 되기 전에 공을 던지거나 배트를 휘두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이 마법의 주문은 나를 '셋'까지 잡아놓는다. 신기하게도 침착하게 한 플레이들은 대부분 좋은 결과를 낳았다. 물론 너무 침착할 때는 상대보다 느릴 수 있지만 그때는 '상대도 잘했고 나도 잘한 거야'라며 나 자신을 위로해줬다. 그렇게 나는 나의 성급함을 계속해서 줄여나갔고 조금 더 여유롭게 플레이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나는 데뷔 시즌에 Rookie of the year, 올해의 신인상을 받게 된다. 

 

마법의 주문 "Locka bleiben"은 야구뿐 아니라 나의 학업에도 좋은 영향을 미쳤다. 유학 초기에, 나는 무조건 모든 것을 빨리, 그리고 완벽하게 해내려고 했다. 그럴수록 나는 나의 목표와 현실적인 실력과의 괴리에서 좌절했고 내 자존감은 바닥을 찍게 되었다. 이제 나는 완벽하려 하지도 않고 빨리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오늘 안되면 내일 하면 되고, 완벽하지 않아도 일단은 완성하면 그다음에 더 잘하면 된다. 내 삶의 대부분을 한국어로 생각하고 글을 썼는데 몇 년 만에 독일어로 완벽한 글을, 특히 독일 사람도 어려워하는 철학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 자신의 현재 상태를 인정하니 마음이 편해졌고 조급함도 사라졌다. 결국 나는 좋은 성적을 받고 논문을 완성했다. 지금도 가끔씩 내 마음의 조급함이 나오려고 할 때면, 나는 마법의 주문을 마음속으로 되뇐다.

 

Locka bleib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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