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치 클리어링이란? 그라운드 내의 선수들끼리 시비가 붙어 물리적 충돌까지 발생하거나 그 바로 직전의 경우, 팀원을 지키기 위해 그라운드뿐 아니라 벤치에 있던 선수들까지 모두 달려 나오는 것. 프로에서는 벤치 클리어링 때 나오지 않는 선수는 팀 분위기를 망친다는 이유로 벌금을 물기도 한다.
바람은 선선하게 불면서 해는 쨍쨍한, 야구하기 최고의 일요일이었다. 이 날 우리는 리그의 마지막 경기가 있어서 차를 타고 옆 도시로 향했다. 독일의 고속도로인 아우토반 Autobahn을 타고 한 시간이 조금 지났을 무렵, 처참할 정도의 관리를 보여주는 경기장이 나왔다. 경기장의 상태가 좋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우리의 상대팀은 해체되고 선수들은 다른 팀으로 흩어질 예정이었다. 그리고 이미 리그는 우리 팀이 압도적인 성적으로 우승을 확정 지은 상태였기에 상대팀은 경기장 관리보다 팀의 역사상 마지막 경기 뒤 있을 그릴 파티에만 신경을 썼다. 원정팀 더그아웃에 짐을 풀고, 상대팀과 인사를 나눴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릴을 하기 위해 음식과 술을 많이 준비해놨다며 끝나고 즐겁게 놀다 가라고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곧이어 다가올 피 튀기는 난투극을...
홈경기보다 원정 경기에 더 적은 사람이 참여하는 편이다. 이번 원정경기에도 딱 10명의 선수가 동행했다. 야구는 9명이 하는 스포츠기 때문에 경기 초반에 누군가 부상이라도 당하면 경기력에 지장이 생길만한 인원수였다. 인원이 딱 맞았던 관계로, 나는 원래 포지션인 내야가 아니라 외야수로 경기에 나섰다. 5번 타자 좌익수가 내가 맡은 이 날의 임무였다.
이 날 나의 성적은 만족스러웠다. 첫 타석부터 안타와 타점을 기록했고, 다음 타석에서도 안타를 쳤다. 이후 두 개의 도루를 더해 시즌 우리 팀의 도루왕이 되었다. 수비에서도 완벽했다. 나에게로 총 세 번의 공이 날아왔고 그 세 번 모두 무리 없이 잡아냈다. 첫 번째 타구는 매우 쉬운 easyflyball이었다. 그다음 아웃 카운트는 매우 중요한 아웃카운트였다. 주자 2, 3루에 2 아웃인 상황. 나는 좌타자가 나왔기 때문에 중견수 쪽으로 치우친 수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 팀 투수인 파울의 빠른 공이 타자 방망이 끝에 맞았고, 공은 내 쪽으로 강하게 날아왔다. 그런데 중견수와 달리 코너 외야수에게 오는 공은 끝에 항상 휘어져 나간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이 옆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다행히 나도 몇 번 경험이 있다 보니 스타트를 빨리 끊을 수 있었다. 잡힐 듯 말 듯 나를 피해 계속 옆으로 꺾이던 공. 이 공을 잡기 위해서는 다이빙 캐치라는 승부수를 걸어야 했다. 다이빙 캐치는 보기에 멋질 수 있지만 실패하면 공이 빠져서 위험하기도 한 시도였다. 있는 힘을 다해 점프 한 뒤 내 글러브에는 공이 감기는 좋은 '척-' 소리가 났고 나는 한 바퀴를 데굴데굴 구르면서도 글러브 안의 공을 놓치지 않았다. 이닝을 끝내는 멋진 아웃. 원정팀의 선수들과 관중들도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는 나에게 박수를 쳐줬고 기분 좋게 공수교대를 했다. 그리고 그다음 이닝에 일이 터졌다.
이번에도 공은 내게로 왔다. 그러니까 이 공은 내가 이 경기에서 잡은 마지막 아웃카운트였다. 주자는 이전과 똑같이 2, 3루였는데 이번엔 1 아웃이었다. 내게 그라운드 볼이 온다면 홈에 던지거나 2루에 던지고, 플라이 볼이어도 홈 승부를 해야 하는 상황. 그리고 약간 먹힌 공이 좌익수 방면으로 날아왔다. 외야수를 많이 해본 건 아니지만 몇 번 배웠던 대로 공이 오길 기다리다가 공이 잡힐 때쯤 스텝을 밟아 앞으로 갔다. 공을 잡자마자 탄력을 이용해 바로 홈으로 승부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공을 잡았을 때 1루수를 맡던 우리 팀 코치 데니스의 외침이 들렸다.
2루!!!
아마 2루 주자가 너무 많이 나가 있던 것 같다. 나는 잡자마자 2루수 준에게 공을 던졌고 공은 아주 깔끔하게 2루수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갔다. 결과는 세잎. 그런데 공이 2루로 향하는 걸 보고 3루 주자가 홈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준이 바로 홈으로 공을 던졌다. 송구는 정확했고 공은 이미 포수인 마틴의 미트에 있었다. 그런데 주자가 마틴에게 매우 강한 태클을 했고 마틴이 나가떨어졌다 (참고로 마틴은 슬로바키아 야구 국가대표 출신이다). 나와 중견수였던 베니는 심판의 아웃콜만 보고 더블 아웃을 했다며 좋아하고 있었다. 베니가 나에게 잘했다고 웃음 지어 보이던 순간, 갑자기 베니가 글러브를 내팽개치고 홈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라운드에는 벌써 엉켜 붙어서 서로 주먹을 날리는 둘 과 그들을 '뜯어' 말리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나도 달려가서 마틴에게 욕을 하는 상대 팀 투수를 끌어냈다 (이 투수는 분데스리가 선수였는데 몸이 다른 세상 사람 같았다... 큰 바위를 끌어내는 느낌).
누가 봐도 주자의 잘못이었다. 이미 아웃인 상황이었고 그런 강한 태클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 경기라 많은 관중 앞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그 주자는 너무 강한 태클을 했고 마틴은 "여기가 무슨 메이저리그냐"면서 불같이 화를 냈다. 상황이 진정되고 우리 팀은 뒤로 가서 미팅을 했다. 팀원들의 입술이 여기저기 터져있었고 모두 화를 가라 앉히지 못한 상태였다. 대다수의 팀원들은 경기를 포기하고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런데 플레잉 코치였던 데니스가 말했다
"우리는 지금 정식 리그 경기를 뛰는 거야. 경기를 시작했으면 끝날 때까지는 하자. 우린 지금 싸움이 아니라 야구를 하러 온 거고, 대답은 야구로 하자고!"
좋은 말이었다. 하지만 큰 공감을 얻어내진 못했고 우리는 결국 집중력이 떨어져 이 경기에서 대패를 하고 만다. 재미있는 것은 경기가 끝나고 난 뒤였다. 화가 난 친구들 대부분은 경기가 끝나자 바로 우리끼리만 인사를 하고 집으로 갔다. 차가 없어서 마틴과 함께 준의 차를 얻어 타고 온 나는 준과 마틴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까 벤치 클리어링의 주인공이었던 마틴이 끝났으니 같이 밥이나 먹고 가자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나, 준, 마틴, 그리고 벤치 클리어링에서 입술이 다 까진 우리 '쿠바노' 디오와 코치 데니스는 어느새 맥주를 들고 고기를 먹으며 상대팀과 즐겁게 놀고 있었다. 뭔가 남고를 다녔던 기억이 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전 세계 어디든 남자들은 다 똑같구나...'
재밌는 사실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왔다. 야구는 졌지만, 싸움도 있었지만, 나중에 남들한테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는 하나 생겼다.
"야, 너 벤치 클리어링해 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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