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리는 소녀"라는 애니메이션 속 한 장면, 칠판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Time waits for no one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애니메이션을 본 지는 한 참되었지만 이 문구는 오랫동안 잊히지가 않는다. 국방부 시계를 거꾸로 달아놔도 시간은 가고, 부모님이나 가족들이 언제까지나 함께 하길 바라지만 흘러가는 세월도, 이별도 막을 수 없다.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 것이 또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기회'다. 한번 놓친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고, 준비된 자만이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기회는 바로 지금 이 순간 잡아야 하는 것이다.
4부 리그에서 내 타율은 3할이 조금 넘었다. 10번 중 3번 안타를 쳤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수준이 높은 3부 리그에서 저번 시즌 나의 타율은 4할 1푼 4리였다. 즉, 10번 중 4번 안타를 쳐냈다. 나는 어떻게 더 수준 높은 리그에서 더 좋은 타율을 기록할 수 있었을까? 연습을 하면서 타격 실력이 늘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 가장 중요한 차이는 나의 마음가짐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3부 리그에서의 나는 더 이상 4부 리그 때처럼 공을 기다리지 않았다. 나는 눈에 공이 보이면 무조건 쳤고, 그 결과 타율을 1할이나 좋아졌다. 내가 마음을 고쳐먹게 된 것은 시즌이 시작하기 전 연습경기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이전까지의 나는 타석에서 소극적이었다. 나는 나에게 어떻게든 투수를 괴롭히고 볼넷을 얻어내서 루상으로 살아나가야 한다는 임무만 주었다. 4부 리그에선 이러한 전략이 먹혔다. 왜냐하면 4부 리그의 투수들은 제구가 좋지 않아서 기다리면 어떻게든 출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3부 리그는 달랐다. 투수들은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공을 던졌고, 훨씬 빠른 공을 던졌으며, 결정구로는 변화구도 던졌다. 투수가 유리한 카운트에서 익숙하지 않은 변화구가 날아오면 나는 타이밍이 뺏겨서 헛스윙을 하거나, 방망이도 휘둘러 보지 못한 채 삼진을 당했다. 연습 경기의 마지막 타석, 나는 이번에도 무조건 살아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오는 두 개의 공은 지켜봐야지라고 생각하고 배트를 휘두르지 않았다. 1구는 한가운데로 들어오는 직구였다. 그 공을 놓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칠걸 그랬나?
그러나 후회를 해도 이미 늦었다, 공은 이미 포수의 미트에서 투수에게로 넘어간 상황이었으니. 1 스트라이크 0 볼에서 2구, 이번엔 실투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깥쪽 높은 공이었다. 연습 배팅에서 나는 그쪽으로 오는 공을 항상 장타로 연결했었다. 하지만 나는 '살아나가야만 한다'라는 생각에 소극적이 되었고, 기회를 또 놓쳤다. 그러자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하... 그냥 쳤으면 안타가 됐을 텐데
머릿속이 복잡해지자 타석에서 내 몸은 더욱 굳어갔고 나는 결국 2 스트라이크 2 볼에서 바깥쪽으로 크게 빠져나가는 슬라이더에 속아 헛스윙 삼진을 당했다. 경기가 끝나고 친구들과 경기에 대한 복기를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말은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방망이에 공이라도 맞췄다면 이 정도로 후회를 하진 않았을 것이다.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게 억울했다. 그래서 다음 경기부터 나는 무조건 치기로 마음먹었다: '죽어도 치고 죽는다. 파울이라도 좋고 아웃이어도 좋으니 공이라도 휘둘러보고 죽자.'
3부 리그의 시즌 개막전 첫 타석, 나는 타석에 들어가기 전부터 초구를 휘두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낮은 볼이든 높은 볼이든 상관없었다. 내 타석이 왔고, 초구를 휘둘렀다. 가운데로 몰린 공이었고, 공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빠르게 3루수와 유격수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안타였다. 그때부터 나는 도루 사인이 없으면 무조건 초구와 2구를 휘둘렀고, 덕분에 내 타율이 1할이나 올라갔다.
"놓치면 똥 된다"라는 격언은 비단 야구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밥을 먹기로 한 친구와 약속을 미루다가 그 친구가 사고로 죽기도 하고, 머뭇거리면서 고백하지 않았던 사람은 다른 사람의 연인이 되어있기도 하다.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먼저 기회를 잡을 만한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준비를 써먹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한번 지나간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머뭇거리는 일이 있다면 일단 해보자. 안 좋은 결과에 후회할 수도 있지만 아예 해 보지도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낫다.
'나는 독일에서 야구를 한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삶이 흔들릴 때 필요한 두 가지 독일어 표현 (그런데 이제 야구를 곁들인..) (0) | 2021.09.24 |
---|---|
감사합니다, 야구할 수 있음에 (0) | 2020.09.24 |
야구와 인생의 공통점 (0) | 2020.09.24 |
프로보다 치열했던 사회인 야구의 벤치클리어링 (0) | 2020.09.24 |
혼자가 아니야 (0) | 2020.09.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