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le Köche verderben den Brei
라는 독일 속담이 있다. "요리사가 많으면 죽을 망친다"라는 뜻으로, 우리나라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와 비슷한 뜻의 속담이다. 이 속담은 우리 삶 곳곳에 적용된다. 내가 이 속담을 가장 많이 상기하게 되는 건 글을 쓸 때이다. 논문이나 에세이를 쓰다 보면 언제나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러다 보면 너무 많은 내용들을 한 편의 글에 다 담으려 한다. 그렇게 완성한 글은, 새로운 색을 만들어 보려고 계속 덧칠하다가 결국 검은색이 되어버린 팔레트의 물감 같은 글이 된다. 논리적으로 정합적인 글을 쓰려고 노력할 때보다 오히려 힘을 빼고 의식의 흐름대로 쓸 때 더 좋은 글이 나오는 경험을 많이 해봤던 나는, 나의 독일 사회인 야구 데뷔전에서 또 한 번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너무 잘하려는 마음이 오히려 일을 그르친다는 경험을.
독일 야구 데뷔전은 홈경기였다. 나는 6번 타자 유격수로 선발 출전했다. 사실 이렇게 빨리 경기를 뛸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안 했기 때문에, 긴장감은 전혀 없고 내 삶에서 처음으로 리그에 등록된 정식 야구경기를 할 수 있다는 설렘만 있었다. 아마추어 리그의 야구경기답게 경기는 처음부터 난타전으로 시작되었다. 1 아웃이었던 1회 초 수비 상황, 상대는 이미 2점을 얻어 2:0으로 앞서고 있었고 나는 병살타를 노리기 위해 약간 2루 베이스에 치우쳐서 수비를 하고 있었다. '깡' 소리와 함께 우타자의 당겨친 공이 3루수 쪽으로 굴러갔다. 그리고 내 몸은 이미 공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본능적인 슬라이딩. 그러나 뭔가 이상했다. 2루 쪽에 치우쳐 있었던 나에게 공은 너무 먼 쪽으로 굴러왔고 나는 나도 모르게 팔이 아니라 내 오른쪽 다리를 뻗어서 정강이로 공을 막았다. 우리 팀의 코치 로지는 시합이 끝나고 이 장면에 대해 두 가지 점에서 놀랐다고 했다. 우선, 당연히 빠질 거라 생각했던 공을 내가 막았기 때문에, 그리고 내야에 굴러오는 야구공을 경기중에 다리, 그것도 다리뼈로 막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했다. 사실 나도 그럴 생각은 없었고 본능적으로 축구하던 게 남아있어서 발을 뻗은 것이었다. 리그 데뷔치고는 나름 강렬한 (?) 첫인상을 남겼다.
3회 초, 점수는 벌써 케네디 스코어 (7:8)가 되어있었고 우리 팀은 2 아웃을 잡았다. 1루에 있던 주자가 도루를 해서 2사 2루 상황. 1 아웃만 잡으면 공수교대였다. 다시 한번 귀를 찌르는 날카로운 알루미늄 배트 소리와 함께 공이 내쪽으로 날아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공은 내 글러브 안으로 들어와 있었고 다시 한번 정신이 들었을 때는 내가 던진 공이 1루수 미트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포물선이 아니라, 잘 채 져서 직선으로 아름답게 날아간 그 공은 타자주자보다 빠르게 1루수의 미트로 꽂혔다. 깔끔한 첫 아웃 카운트. 수비가 끝나고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면서 모든 팀원들이 하이파이브를 해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팀 코치 로지가 말했다.
Hey Jungs, das war firstout von Min in der Bezirksliga!
헤이 친구들, 이게 민의 베찌억스리가 첫 아웃카운트였어!
모두가 박수를 쳐줬고, 다음 타석에선 리그 첫 안타도 쳐냈다. 자신감이 붙은 나는 다음 이닝에 똑같은 방식으로 아웃을 잡아냈다. 좀 당황해서 강하게 오는 볼을 글러브가 아니라 맨손으로 잡긴 했지만 역시나 깔끔한 아웃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든 게 잘 될 줄 알았다.
처음에 경기가 잘 풀리다 보니 점점 욕심이 생겼다. 완벽한 데뷔전을 해내고 싶었고 더 멋진 수비를 해내고 싶었으며 승리의 주역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이 많아지다 보니 몸에 힘이 들어갔고 어이없는 실수를 하게 된다. 평범한 내야 플라이 볼, 나보다는 2루수인 준이 잡는 게 더 편한 공이었다. 그런데 공만 보고 달리다가 준과 충돌했고 공은 데굴데굴 굴러 주자가 살게 되었다. 준과 투수였던 디오에게 미안하다고 했지만 실수를 하니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멋진 플레이로 실수를 만회하고 싶었다. 기회는 바로 찾아왔다. 다음 타자가 친 공이 유격수 쪽으로 왔고 2루로 빠르게 던져 병살타를 만들 수 있는 기회였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1루 주자가 어디 있는지 확인했고 2루 주자가 어디 있는지 확인해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조급한 마음으로 힘차게 던진 공은 어이없게도 우익수 쪽으로 향하고 말았다. 실책과 함께 긴장이 풀리며 집중력은 무너졌고 결국 우리 팀은 이 이닝에 역전을 당하게 되고 패배하게 된다.
경기가 끝나자 그제야 아까 공에 맞은 부분이 아프게 시작했다. 다리도 아프고 팀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친구들은 나를 위로해주긴 했지만 사실 다른 팀원이 실수하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다들 즐거운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처음엔 즐기자는 마음가짐이었지만 막상 경기가 진행될수록 마음이 조급해지고 긴장하게 되어 실수를 했다. 아무도 나를 압박하지 않았다.
나를 옭아맨 건 나 자신이었다.
그땐 몰랐다. 야구가 원래 그렇다는 것을. 야구는 인생과 비슷해서 내 마음대로 되는 게 별로 없다. 누구나 선수들이 하는 멋진 플레이를 생각하며 타석에 들어서고 수비에 임하지만 야구공은 내가 원하는 대로 오지 않는다. 삶에서도 우리는 오히려 잘하려고 할수록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경우를 많이 경험한다. 그럴 때는 마음을 비우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된다.
내가 좋아하는 김연아 선수의 말. 엄청난 무게의 압박감을 수 없이 견뎌온 그녀의 경험치가 느껴지기에 더 존경스럽다.
야구에는 "3할 타자"라는 단어가 있다. 10번 중 3번 이상 안타를 친 타자를 뜻하는 말이며 어느 정도는 '야구를 잘한다'라는 기준이 되는 게 바로 3할이다. 바꿔 말하면, 야구를 잘한다는 타자도 10번 중에 7번은 아웃을 당한다. 중요한 건 안타를 쳤든 못 쳤든, 내게는 다음 타석이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고칠 점이 있으면 반성하고 다시 실수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때때로 사람들은 지나간 과거를 뿌리치지 못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럴 땐 생각을 잠시 멈춰보자. 그리고
그냥 해
그냥 하면, 어쩌면 더 좋은 결과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미래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니까. 이것이 내가 야구를 통해 얻은 소중한 인생의 교훈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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