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끄적끄적/철학으로 해석하는 영화

오대수 불행의 원인 (feat.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 오이디푸스 왕) I [올드보이 해석]

by 별_ 2020. 9. 26.
반응형

„올드보이“의 주인공인 오대수는 15년 동안이나 독방에 갇혀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이 남자는 도대체 어떤 잘못을 했길래 이토록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된 것일까요?

1. 시학과 좋은 비극의 조건

영화 „올드보이“의 주인공의 이름은 오대수 „오늘도 대충 수습하며 살자 “라는 뜻의 이 이름은 오대수의 삶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이름은 오이디푸스라는 이름과도 매우 닮아 있죠.

<오이디푸스 왕>의 줄거리

오이디푸스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라는 비극에 나오는 주인공입니다. 오이디푸스는, 미래에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엄마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신탁 때문에 부모에게서 버림받게 됩니다. 이때 그의 발목을 묶어서 버려서 „부은 발“이라는 뜻의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자신의 저주받은 운명을 피하기 위하여 코린트 Korinth를 떠나던 오이디푸스는 우연히 자신의 아버지 라이오스 왕을 만나 언쟁을 벌이다 그를 죽이고 어머니 요카 스테와 결혼을 합니다. 물론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죽인 사람이 아버지인 줄, 그리고 자신의 부인이 어머니인 줄 몰랐죠. 저주받은 운명을 피하지 못한 그는 고통스러워하며 자신의 두 눈을 멀게 하고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이디푸스 왕의 줄거리입니다. 그리고 이 오이디푸스 왕이란 작품은 지금까지도 훌륭한 비극의 표본으로 불립니다.

<시학> 속 좋은 비극의 조건

<시학>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Περὶ ποιητικῆς는 시에 관하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책의 6장에서 좋은 비극의 조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좋은 비극은 1) 관객에게 연민 (ἔλεος)과 두려움 (φόβος)를 불러일으키고 2) 그것을 해소시킬 수 있는 비극입니다.

시학에서 좋은 비극의 예시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입니다. 오이디푸스 왕의 주인공 오이디 푸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좋은 비극을 위한 비극적 인물의 특성을 잘 나타냅니다. 그에 따르면, 비극의 주인공은 1) 악하지(κακία und μοχθηρία), 않아야 하며 2) 하마르티아 때문에 (δί άμαρτιαν τινά) 행복에서 불행으로 빠져야 합니다. 이 두 조건을 충족시켰을 때 가장 큰 연민과 공포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죠.

*하마르티아란, 과녁을 맞히지 못했다는 뜻의 동사 하마르 타네인ἁμαρτάνειν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즉, 행위자의 행위가 자신의 의도와 다른 결과를 초래한 상황에 쓰입니다. 하마르티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 3권에서 말한 ‚무지 안에서 (ἄγνοῶν)‘ 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그는 이러한 행위를 술 취한 사람의 행위에 비유한다. 무지 안에서 하는 행위는, 행위자가 보편적으로 어떤 행위가 옳은지에 대해 알고 있지만 성격적 결함 (예를 들면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올바른 행위를 하지 못하는 행위를 말한다. 실제로 오이디푸스도 자신의 욱 하는 성격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합니다.

 

2. 오대수의 과오: 말장난과 성격

영화의 앞부분에서 술에 취해 난동을 피우는 오대수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오대수가 나이만 들었지 철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대수가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린 날을 하나밖에 없는 딸의 생일이었습니다. 일찍 집에 들어가긴커녕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던 오대수는 영문도 모른 채 납치를 당해 감금을 당하게 됩니다. 무려 15년이나 말이죠.

영화의 후반부에 우리는 왜 오대수가 15년 동안이나 감금을 당했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오대수는 서울로 전학 가기 전, 남매관계인 우진과 수아가 애정행각을 벌이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친구인 주환에게 자신이 목격한 것을 말합니다.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결국 수아가 주위의 시선을 못 견뎌 자살을 하게 되고 우진은 이에 대한 복수로 대수를 감금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감금은 더 큰 복수를 위한 우진의 큰 그림이었습니다.

- 오대수의 하마르티아 hamartia

15년 간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오대수는 미도와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자신이 감금된 15년 동안 매일 먹었던 군만두를 단서로, 자신을 감금한 사람을 찾아나갑니다.

대수는, 복수를 위한 여정의 종착점에서, 미도가 자신의 친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로 인해 받은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 그것이 바로 우진이 계획했던 복수였죠. 이 부분은 자연스럽게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오이디푸스 역시 누군지 모르고 자신의 아버지 라이오스 왕을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인 요카 스테와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 오이디푸스 왕을 떠올리게 하는 또 한 장면이 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오대수가 15년간 평범한 삶을 빼앗겼던 것은 자신이 혀를 잘못 놀렸기 때문이었죠.

„당신이 낸 소문이 이수아가 임신했다고 발전했어! “

3. 오대수의 비극

-하마르티아 해석에 대해서는 단순한 ‚지적 실수‘로 보는 입장과 ‚도덕적 죄‘로 보는 입장이 있습니다. 단순한 ‚지적 실수‘로 해석하는 입장은 오이디푸스의 행위/하마르티아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는 무지 (라이오스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과 요카 스테가 자신의 어머니라는 사실에 대한)에 기초하기 때문에 하마르티아가 ‚도덕적 죄‘를 나타낸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3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무지 때문에 (δί ἄγνοιαν) ‘ 하는 행위와 ‚무지 안에서 (ἄγνοῶν)‘ 하는 행위를 구분한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 같습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3권은 행위와 그 책임에 대한 논의로 시작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행위의 책임은 ‚그 행위가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숙고를 거친 행동은 자발적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숙고란, 행위자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알맞은 수단을 선택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핏 보기에 ‚몰라서 한 행위‘는 비자발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무지에 기인한 행위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죠. 무지에 기인한 행위도 행위의 운동인이 행위자 자신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하는 하마르티아는 ‚무지 안에서‘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그는 이러한 행위를 술 취한 사람의 행위에 비유합니다. 무지 안에서 하는 행위는, 행위자가 보편적으로 어떤 행위가 옳은지에 대해 알고 있지만 성격적 결함 (예를 들면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올바른 행위를 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올드보이의 주인공 이름은 오대수. 극 중 최민수는 오대수의 이름이 „오늘만 대충 수습하고 살자 “라는 뜻이라고 말 하지만 „오대수“라는 이름은 곧바로 „오이디푸스 Oedipus “를 연상시킵니다.

-술을 먹고 난동을 부려 파출소에서 보호자를 기다리는 오대수. 그는 그 시간에도 경찰들에게 추태를 부립니다. 그리고 가족에게 전화를 하던 도중 납치되고 15년간 어딘지 모르는 방에 감금됩니다. 15년간 복수의 칼날을 갈아온 그가 제일 처음 만나는 것은 옥상에서 자살하려고 하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오대수에게 묻습니다: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어도 살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 “ 이 말은 영화의 마지막 오대수가 쓴 편지에도 나오죠.

-오대수는 미도 (강혜정)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오이디푸스와 요카 스테의 비극적 운명을 연상시킵니다. 왜냐하면 사실 미도는 오대수의 딸이기 때문이죠. 사실 이 모든 것은 이우진 (유지태)의 복수였습니다.

-교복을 입고 담배를 태우는 오대수. 그러다가 그는 수아 (윤진서)를 만나고 수아가 동생 우진과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 사실을 친구에게 말하고 소문은 와전되어 수아와 우진은 고난을 겪습니다. 결국 수아는 자살을 선택하게 되고 이때부터 우진은 오대수에 대한 복수를 계획했던 것입니다.

-이 영화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하는 좋은 비극의 플롯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오대수라는 사악하지는 않지만 도덕적으로 완벽한 것도 아닌 주인공이 자신의 하마르티아 (우진과 수아의 이야기를 친구에게 이야기한 것) 때문에 불행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딸과의 근친상간을 알게 되고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르듯이 오대수는 혀를 자르죠). 사실 오대수는 미도가 자신의 딸이란 것을 모를 수도 있었습니다.

미도가 우진이 없는 곳으로 도망가자고 한 충고를 들었더라면, 오대수가 마지막에 자신의 혀를 자르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대수는 자신의 성격 때문에, 복수를 행하려다가 오히려 더 큰 비극에 빠지고 맙니다. 이 대목은 요카 스테의 조언을 듣지 않고 사람들을 추궁하여 자신의 하마르티아를 인식하고 불행에 빠지는 오이디푸스의 모습과 똑같다. 하지만 오대수의 진정한 하마르티아는 자신의 입을 함부로 놀렸다는 것이죠. 영화는 이 점을 명확히 짚어 줍니다.

- 비극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아 보입니다. 주인공의 삶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기 때문이죠. 그런데 왜 사람들은 비극을 보며 연민을 느끼는 것일까요? 오대수의 노트에 적혀있던 것처럼, 과오가 그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 도덕적 죄라면 주인공의 불행을 ‚사필귀정‘쯤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