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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철학으로 해석하는 영화

시작하는 연인들을 위한 영화 (feat. 칸트) I [클로져Closer 해석]

by 별_ 2020.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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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또, 싸우기도 합니다. 싸움은 보통 사소한 갈등에서 시작됩니다. 갈등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갈등에서 시작된 싸움이 때로는 관계를 파멸로 이끌기 때문이죠. 그러나 갈등이 꼭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갈등이 인류와 역사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에 제가 분석해 볼 영화는, 그러한 칸트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영화, <클로져>입니다.

1. 칸트의 Antagonismus

칸트는 세계시민적 견지에서 본 일반사의 이념 "Idee zu einer allgemeinen Geschichte in der weltbürgerlichen Absicht"에서 역사가, 자연의 궁극 목적 Endzweck인 „인간의 소질의 완전한 발현“die Vervollständigung der menschlichen Anlage으로 다가가는 annähern 과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이런 발전적 과정의 동력 Motor이 되는 것은 인간이 선해서도 아니고 자연이 인간이 잘 되기를 바라서도 아니라, 바로 Antagonismus입니다. Antagonismus는 Anti(=gegen)와 agon(=Streit)의 조합어로, 대립이나 갈등을 나타냅니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사회를 이루어 살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개별화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이러한 성향을 ungesellige Geselligkeit 반사회적 사회성이라 부릅니다. 칸트는 나무의 예를 들면서 이러한 반사회적 사회성이 인간의 자연적 소질을 일깨운다고 한다. 숲 속의 나무들이 서로에게서 공기와 햇빛을 빼앗으려 하다 보니 오히려 꼿꼿하게 자라나는 것처럼 말이죠.

흥미로운 것은 부정적인 이미지인 불화 Zwietracht가 오히려 긍정적인 화합 Eintracht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사회에서 이러한 이기심을 제어할 지배자를 필요로 한다. 칸트가, 역사가 자연의 목적의 실현이 아니라 목적에 다가간다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인간이 필요로 하는 지배자는 바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을 이루고 있는 굽은 목재로부터 완전히 똑바른 것이 나올 수 없기 때문에(„aus so krummen Holze, als woraus der Mensch gemacht ist, kann nichts ganz Gerades gezimmert werden “, IaG, A 396f.) 이는 과제로 주어져 있지만 역사의 가장 끝, 즉 마지막에야 이루어지는 가장 어려운 과제입니다.

2. 클로져의 등장인물들

클로져에는 4명의 주인공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비밀을 가지고 있죠. 포토그래퍼인 안 나와 막 소설가로 데뷔하는 댄, 연인 같아 보이는 이 둘은 사실 연인이 아닙니다. 댄에게는 이미 연인이 있죠. 그녀의 이름은 앨리스. 밤의 세계에서 일하는 스트립 댄서입니다. 그녀만큼이나 은밀한 비밀을 가지고 있는 이 남자는 나중에 안나의 연인이 되는 래리입니다. 그는 의사지만, 사람들이 없을 때는 음란 채팅을 하며 , 모르는 사람과의 성적 대화를 통해 자신의 성욕을 채우는 사람입니다.

 

3. 갈등을 통해 나아가는 관계

성인채팅 사이트에서 자신을 안나로 속인 댄의 거짓말 때문에 래리와 안나는 처음 만나게 됩니다. 래리는 안나가 성인채팅을 통해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기에 처음부터 자신의 은밀한 성적 취향을 안나 앞에서 드러냅니다. 래리에게 비극적 상황이 될 수도 있었지만, 이러한 솔직함 때문인지 그 둘은 결국 사귀고,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혼은 관계의 완성이 아니죠. 결혼 후에 이들에게도 위기가 찾아옵니다. 래리가 출장 간 사이, 래리와 안나가 서로 다른 상대와 바람을 폈기 때문이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들은 언제나 서로에게 솔직하다는 사실입니다. 설령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것 같은 사실도 이 둘은 서로에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합니다. 이혼도장을 찍어달라고 말하는 안나에게 래리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고 결국 마음이 움직여 안나는 래리와 자게 됩니다. 이러한 솔직함들이 관계를 위태롭게 만들기도 했지만, 역설적으로 이 둘은 그 솔직함 덕분에 관계를 회복하고, 유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비 온 뒤에 땅이 굳듯이, 둘의 관계는 갈등 속에서 계속 단단해지죠.

4. 갈등을 피하려다가 끝나는 관계

댄과 앨리스의 관계는 조금 다릅니다. 둘은 서로를 신뢰하지 않죠. 댄은 앨리스를 고향에 데려가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앨리스에겐 상처가 됩니다. 앨리스가 고향을 떠난 이유는, 남자 친구와 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새로운 곳에서 자신의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길 원했습니다. 댄과의 첫 만남에서 말했던 앨리스의 이별 방법은 영화에서 복선이 됩니다. 댄에게도 똑같은 방법을 하며 이별을 고하기 때문이죠. 믿고 의지하기에 댄은 너무 제 멋대로인 사람이었습니다. 이별의 상처를 받기 싫었던 앨리스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이별의 아픔을 겪고 싶지 않아 합니다. 하지만 댄의 태도가 관계를 파멸로 몰고 갑니다 진실을 통해 서로 관계를 만들어가긴커녕 대화를 하다 담배를 산다며 도망가 버리죠. 결국 관계가 발전해나갈 동력은 사라지고, 앨리스는 댄에게 이별을 고합니다. 상처 받을까 봐 두려워 자신의 마음을 감췄던 앨리스는 이별을 결심하고 나서야 비로소 진실을 말합니다.

저는 영화의 제목 Closer가 두 가지 뜻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Closer"는 "close의 비교급", 즉 더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관계에서 가까워진다는 것은 서로를 믿고 신뢰하는 것이다. 그런데 댄과 앨리스의 관계에는 신뢰가 없습니다. 상처를 받기 싫은 마음에 거짓말로 자신을 포장하다 보니 관계 자체가 거짓이 되어버립니다. 결국 그 사람은 마지막엔 닫힌 사람 closer이 되고 그 관계 역시 끝나게 됩니다.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평화보다 지속적인 대립입니다. 대립은 감춰져 있던 모순을 드러나게 합니다. 문제는 이 모순이 드러나지 않을 때인데,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면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아예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관계는 사람과 사람의 대화입니다. 관계에서 대화가 사라지고 응답을 들을 수 없다면 그 관계는 닫혀 버립니다. 인간은 각자 다른데, 무엇이 다른지를 알 수 없게 되고, 결국 발전의 동력을 잃어버린 관계는 멈춰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우리는 반전을 보게 됩니다. 앨리스가 사실 진짜 이름이 아니었던 거죠. 앨리스의 진짜 이름은 제인 존스. 그녀는 오직 옷을 벗는 스트립쇼에서만, 거짓이라는 옷을 벗고 진실을 말합니다.

영화는 반전을 담고 있습니다. 처음에 앨리스가 댄에게 알려줬던 이름은 거짓이었습니다. 사실 이 관계는 처음부터 닫힌 관계였던 거죠. 물론 앨리스의 마음이 열렸다면 관계가 발전하면서 자신의 진짜 이름을 댄에게 말해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둘은 서로에게 닫혀있었습니다. 관계는 서로의 물음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에 응답이 없는 관계에서 나의 물음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합니다.

*지인이 제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군 것 같냐고. 그때도 나름 관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봤을 때지만 함부로 답을 못 했었습니다. 지금은 금방 답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댄이라고. 왜냐하면 그는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자신에게 조차 진실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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