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에 개봉한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은, 영화의 몰입감뿐 아니라 영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으로도 큰 재미를 주었던 작품입니다. 저는, 경험주의자 데이비드 흄의 이론을 토대로 이 영화를 해석해 보고자 합니다.
1. 흄의 "인간 본성론"
흄 철학의 출발점은 '우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믿음들 이과 연 사실과 같은가?'라는 의문이었습니다. 근대 철학의 발전은 과학의 발전과 깊은 연관이 있는데, 흄은 자신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자연과학적(실험적 방법) 방법’을 채택합니다. 이는 추론의 실험적 방법 즉, 오직 경험에 의해 지지되는 결론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경험하지 않은 것을 안다고 믿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아직 경험해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내일 아침에도 반드시 해가 동쪽에서 뜬다 ‘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경험하지 않은 내일 일어날 일에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걸까요?
흄은 또 한 번 묻습니다. 우리가 „내일도 반드시 해가 동쪽에서 뜬다 “라고 믿는다면 이 „반드시 “는 어디서 온 걸까요? 그리고 흄의 결론은 이것은 인간의 본성에서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시간과 공간적으로 근접한 원인과 결과를 반드시 이어진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비이락이라는 사자성어가 보여주듯, 결과와 시/공간적으로 근접한 것이 그 결과의 원인이 아닐 수도 있죠.
2. 믿음 1: 외지인이 사건의 원흉이다.
곡성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사건들, 마을의 경찰인 종구는 사건의 원인을 찾아나갑니다. 그리고 수사를 하면서 마을에 있는 수상한 외지인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결국 종구는 직접 기이한 소문의 당사자, 외지인의 집을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그로테스크한 물건들을 보며 의심의 씨앗을 품게 됩니다. 의심의 씨앗은 종구가 수사를 계속해 나갈수록 경험을 통해 점점 커져가고, 종구도 외지인이 사건의 원흉이라는 의심을 품게 됩니다. 그의 의심이 믿음으로 바뀌는 순간, 더 이상 그는 외지인에게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대로 답변을 하길 강요합니다. 활활 타오르던 종구의 믿음에 무당인 일광이 불을 지핍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무당인 일광이 종구를 떠보고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감나무가 있냐고 해서 없다고 대답하니 감나무가 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라고 말하는 무당처럼, 일광은 종구에게 애매한 질문으로 미끼를 던집니다. 그리고 딸이 아픈 불안한 부모의 마음을 계속 파고듭니다. 누구냐고 물어보는 것에서, 우리는 사실 일광이, 마을 사람들의 두려움의 대상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결국 종구의 불안한 마음이, 일광이 던진 미끼를 물게 만듭니다.
외지인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 종구에게, 외지인은, 마을의 평화를 위해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종구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외지인을 잡으러 가고, 종구의 믿음이 불러온 광기는 외지인을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하지만 외지인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라는 믿음은, 사실이 아니라 단순히 믿음이었습니다. 외지인의 죽음 뒤에도 기이한 일은 계속해서 일어났기 때문이죠. 그러자 무당인 일광은 이제 의심의 타깃을 외지인에서 무명으로 돌립니다.
3. 믿음 2: 무명이 귀신이다.
무명이 귀신이고, 딸에게 가봐야 한다는 일광의 말을 듣고, 종구는 무명을 찾아갑니다. 딸인 효진이가 집에 갔다고 하는 말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미 일광이 던진 미끼를 물어, 무명이 귀신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 중구는, 무명이 말하는 진실을 듣지 않고 일광의 말에 계속해서 현혹됩니다.
3. 믿음 3: 외지인은 악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사제와 외지인의 대화는, 사제의 믿음이 아직도 무명이 아니라 외지인에게 향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역시 자신의 믿음이라는 확신에 갇혀 외지인을 악마라고 생각하죠.
오직 신부만이, 흄이 말했던 '마음의 경향성'을 넘어서 실재를 경험하고 있죠.
"사람들 시각으로 보자면 귀신은 죽은 자의 영혼 아니오? 그런데 그 사람은 살았잖소?... 직접 보셨소? 직접 보지도 않고 어떻게 확신을 하십니까?"
마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된 것이 외지인 때문이라는 것은 단순히 마음의 경향성에서 온 것입니다. 사실 둘 사이의 필연적 결합은 없죠. 그러나 자신의 딸을 향한 강한 부성애가 종구로 하여금 현상을 그렇게 바라보도록 한 것입니다.
외지인을 차로 치었을 때, 종구와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 알았고, 병원에서 딸이 잠시 정상적으로 돌아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외지인은 죽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이 보여주는 것은 외지인의 존재가 사실 마을에 일어난 재앙과 필연적 결합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쉽게 말하면 '오비이락'이죠.
무당도 사람이고 삶을 위해선 돈이 필요합니다. 무당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이 바로 '굿'입니다. 굿은 '굿을 하면 괜찮아지겠지'라는 일시적 마음의 평안 상태를 줄 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무당은 사람 마음의 약한 부분을 건드려 돈을 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이 때문에 무당들은 추론을 잘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추론으로 의뢰인의 고민을 '낚아'내면 그것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휘저어 놓죠. 그렇게 해야 무당은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무당은 종구에게 의미 없는 말을 던집니다. "건드려버리면 안 될 것을 건드려 버렸어". 이 문장에 목적어는 매우 애매모호하죠 그러나 그 대상이 무엇인지 알 필요는 없습니다. 무당은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고, 그 뒤로 그 대상을 조합하는 것은 결국 종구 자신이죠. 종구가 무당의 미끼를 문 것입니다.
- "귀신이 덫에 걸리면 닭이 세 번 운다". 모든 닭이 시간이 지나면 세 번 이상 웁니다. 이 말은 단순히 시간이 흐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자리를 지키면 귀신이 사라진다는 것은, 닭이 세 번 울 동안 종구가 기다린다면, 귀신이 없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을 것이란 의미입니다. 무명의 말은 결국, 종구에게서 믿음이라는 색안경을 벗고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기 위한 말이었습니다.
까마귀가 날자 배가 떨어지듯이, 무명의 옆에 떨어져 있던 딸의 머리핀이 무명이 딸을 잡아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비이락). 단순히 무명이 있는 곳에 머리핀이 있었던 것뿐이지요. 그러나 이미 일광의 말에 사로잡혀 있던 중구는, 자신의 경험을 더해 무명을 귀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명이 처음에 한 말은 사실입니다. 종구가 "딸이 집에 없다"라고 하자 "죽지 않았어" "집에 있어"라고 하는 그 말 말이요.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사로잡혀서 우리의 믿음으로 "인과"라는 연결고리를 마음대로 끼워 넣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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