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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철학으로 해석하는 영화

한 찌질한 영화감독의 연애의 기술 (feat. 아리스토텔레스) I [북촌방향 해석]

by 별_ 2020.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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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아리스토텔레스의 행위 이론 (니코마코스 윤리학 3권)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행위는 자발적이거나 비자발적입니다. 자발적인 행위는 칭찬을 받거나 비난을 받지만, 비자발적인 행위는 칭찬이나 비난보다는 용서나 동정을 받습니다. 즉, 자발적인 행위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자발적인 행위의 조건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행위자가 행위와 관련된 개별 내용들을 알고 행동할 때

예를 들어, 친구인 줄 알고 문자로 반말을 했는데 친구가 아니었다면, 반말한 행위의 개별적인 조건, 즉 대상을 알지 못하고 행동했기 때문에 비난을 받지 않습니다.

2) 행위가 행위자에게 달려 있을 때 (ἐφ' ἡμῖν)

예를 들어, 강한 바람에 밀려나 옆 사람의 발을 밟았을 때, 우리는 이런 행위를 용서할만한 행위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행위자가 행위를 하거나 하지 않을 선택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죠.

1. 준상의 성격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온 성준. 술을 먹다가 자신이 영화감독인 것을 아는 학생들과 합석을 하게 됩니다. 술을 먹고 기분이 좋아진 성준은 좋은 게 있다면서 합석한 사람들과 다른 동네에 같이 갈 것을 제안합니다. 그런데 막상 사람들이 따라오고 나니 갑자기 따라오지 말라며 도망을 갑니다. 성준의 ‚일단 저질러보고 뒷일은 책임지지 않는 성격을 보여주는 장면이죠.

성준이 찾아간 곳은 옛 여자 친구의 자취방.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렇게 불쑥 찾아온 것이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습니다. 뜬금없이 찾아와서 너 아니면 안 된다고 진상을 부립니다. 그런데 자신의 목적대로 하룻밤을 보내고 나니 다시 연락하지 말자면서 연락을 끊어버리려고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여자와 하룻밤 자고는 싶지만 가정을 꾸리거나 한 여자만 사랑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죠.

성준의 책임을 회피하는 성격은 만나는 여자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예전에 같이 일했던 형을 만나는 장면에서는 자신이 말하기 껄끄러운 일들은 남한테 맡겨버리는 무책임함도 보여줍니다.

특히 술집에 앉아 경진이 말하는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우연"으로 치부하고 내가 컵을 깨는 데에는 수많은 이유가 있으니 나는 이유가 아니라고 말하는 장면은 성준의 가치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죠. 성준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저지른 행동이지만 거기엔 나뿐 아니라 수많은 이유들이 존재하는 거니까 나는 원인이라고 할 수 없다. 더 자세히 말하면,

내가 한 행동의 책임을 나한테 묻지 마라.

입니다.

 

2. 경진과 보람: 왜 성준은 경진에게만 키스하는가?

영화에서는 경진과 보람의 상반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는데요, 그중 하나가 경진이 가게를 비우는 것을 불편해하는 보람의 반응입니다. 이 영화에서 가게는, 마음을 의지할 대상을 의미합니다. 보람은 외로움이 많고, 항상 자기 마음을 위로해줄,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의지하려고 하죠. 그럴 때마다 성준은, 보람에게 부담을 느낍니다. 반면에, 경진은 자기 가게임에도 누가 들어오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이러한 장면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얽매이지 않는 경진의 삶의 태도를 보여주며, 바로 이 점이 자석처럼 성준을 끌어들이게 됩니다. 심지어 그녀는 전 여자 친구와 외모까지 똑같습니다. 경진과 성준의 키스신은 두 번 나오는데, 두 번째 나오는 장면이 중요합니다. 성준은 경진의 마음을 떠 보기 위해 계속 전의 일이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로 성준이 경진에게 키스하는 것은, 경진이 술 먹고 자신에게 키스를 했어도 마치 없던 일처럼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뒤입니다. 관계나 자신의 행위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계산이 선 성준이 경진에게 다시 키스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목적을 이룬 성준은, 언제나 그랬듯이 연락도 하지 말라며 경진을 떠나갑니다.

3. 껄끄러운 사람과 상관없는 사람

성준이 전혀 반가워하지 않는 듯한 여인은, 영화에서 유난히 자주 등장합니다. 하지만 만날 때마다 성준은 그녀와 약속도 잡지 않고, 전화번호도 주지 않은 채 자리를 뜨려고 합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다음에 여기 나오는 이 남자에게는 선뜻 자신의 전화번호를 알려준다는 점입니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먼저, 이 여인은 친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 같습니다. 그런데 성준은 무언가 불편한 일, 즉 자신이 책임지고 싶지 않은 일이 있어서 서울을 떠난 상태입니다. 만약 이 여인과 이야기를 길게 나누면 자신의 과거 행적이 드러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이 비난받아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기에 성준이 그녀를 껄끄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화번호를 교환하는 남자는 그다지 친하지 않아 보입니다. 서로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죠. 이 말은, 어차피 이 사람이 전화번호를 받아가도 연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성준은 이미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친하지도 않은 이 남자에게는 선뜻 자신의 번호를 내어줄 수 있는 것이죠.

성준은 과연, 자신의 행위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여기까지, 행위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에도, 행위에 대한 책임은 회피하려는 남자의 이야기, 북촌방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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