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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철학으로 해석하는 영화

죽음을 부르는 저주받은 노래? 글루미 선데이와 자살의 이유(feat. 칸트) I [글루미 선데이 해석]

by 별_ 2020.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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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저녁식사 자리. 여자는 오늘 최고의 순간이 글루미 선데이라는 곡을 들었던 순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녀는 글루미 선데이를 들으며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녀는 왜 노래를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선택했을까요? 인간 존엄성에 관한 영화, 글루미 선데이입니다.

1. 자보, 일로나 안드라스 그리고 한스

헝가리에 살고 있는 유태인 자보는 자신의 연인 일로나와 자신의 이름을 딴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레스토랑에서 연주할 피아니스트를 뽑게 되는데, 그가 바로 안드라스입니다. 이 레스토랑에는 일로나를 보러 자주 들르는 한스라는 독일 손님이 있습니다. 그는 일로나를 보기 위해 레스토랑에 와서 비프 롤을 먹지만, 일로나는 그를 손님으로만 대합니다. 일로나의 생일날, 돈이 많은 자보는 머리핀을 선물하고, 돈이 없던 안드라스는 그녀를 위한 곡을 작곡하는데, 이 곡이 바로 글루미 선데이입니다. 그리고 한스는 그들을 바라보기만 하죠. 뜬금없이 자기 어필을 하더니, 일로나에게 고백을 하고 거절당하게 됩니다. 상심한 한스는, 부다페스트의 관광 명소인 세체니 다리에서 뛰어내리고... 떨어진 한스를 자보가 구해줍니다. 자보 덕분에 목숨을 구한 한스는, 언젠가 꼭 자신이 빚을 갚겠다며 다시 독일로 돌아갑니다. 둘이 나누는 마지막 대화에서 이 둘의 서로 상반된 가치관을 알 수 있습니다.

한스: 은혜를 갚을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자보: 괜찮아. 당신이 아무리 무역업자라도 눈멀고 이가 없는 사람은 필요가 없을걸?

한스: 맞아. 적자생존이지

...

자보: 그런 말이 아냐. 동물은 동물답게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지.

과연 한스는 자보에게 은혜를 갚게 될까요? 아니면 은혜를 갚지 않더라도, 최소한 사람답게 살아갈까요?

2. 글루미 선데이

한스가 독일로 돌아간 뒤, 자보 일행에게는 세 가지 변화가 생깁니다. 한 가지 변화는 일로나가 자보뿐 아니라 안드라스와도 사귀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들의 관계를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이들은 서로를 이해해 주고 셋은 아주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됩니다. 두 번째로, 글루미 선데이의 성공으로 안드라스 유명해지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곡에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 노래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극단적 선택을 했던 것이죠. 자신이 만든 곡 때문에 사람들이 죽자 안드라스는 괴로워합니다. 세 번째로는 독일의 히틀러, 그리고 나치가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독일로 돌아갔던 한스도 나치가 되어 헝가리로 돌아오죠. 그런데 한스가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자신을 대령이라고 하고, 비프 롤이 없다는 자보에게 화를 내더니 자보에게 자신을 웃겨보라고까지 합니다. 그러자 자보는 비꼬는 듯한 농담으로 응수하죠. 그리고 안드라스에게도 무례한 요구를 합니다. 안드라스가 거부하는 일촉즉발의 상황, 그러자 안드라스를 구하기 위해 일로나가 처음으로, 글루미 선데이에 가사를 붙여 노래를 합니다.

Trauriger Sonntag, dein Abend ist nicht mehr weit

우울한 일요일, 당신의 밤은 멀지 않았어요.

Mit schwarzen Schatten teil ich meine Einsamkeit

검은 그림자와 함께 나는 내 외로움을 나눠요

Schließ ich die Augen dann seh ich sie hundertfach

내 눈을 감으면 난 그 외로움들을 더 잘 볼 수 있어요

Ich kann nicht schlafen und sie werden nie mehr wach

난 잠을 잠 수 없고 당신은 더 이상 깰 수 없을 거예요

Ich seh Gestalten zieh´n im Zigarettenrauch

담배 연기 속에서 형체들이 보여요

Laßt mich nicht hier, sagt den Engeln ich komme auch

날 여기 혼자 두지 말아요, 천사들에게 내가 곧 간다고 말해줘요

 

Trauriger Sonntag

 

그런데 자기 인생 최고의 작품이 완성되는 것을 듣고, 안드라스는 한스의 총으로 자살을 합니다.

3. 존엄성을 지키는 죽음

자보는 글루미 선데이를 듣고 사람들이 죽음을 선택하는 이유를 마지막 남은 존엄성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존엄성은 무엇이며 이것이 자살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요?

-칸트는„윤리형 이상학 정초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에서 인간의 존엄성 die Würde des Menschen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단순히 수단으로써의 상대적 가치만을 가지는 것은 물건, 이에 반해 그것들 본성이 이미 목적 그 자체 Zweck an sich인 이성적 존재자들은 인격 Persönlichkeit이라 불립니다. 물건들은 가격을 갖습니다. 이렇게 가격을 갖는 것은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있다. 500짜리 동전은, 500원의 가치를 갖는 사과로 대체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모든 가격을 뛰어넘는, 가격을 매기는 이성적 존재자들은 가격 대신 내적 가치, 즉 존엄성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통해 자율적으로 수립한 보편적 도덕 법칙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이 존엄성은 물건처럼 상대적인 가치를 갖는 게 아니라 절대적 가치를 갖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습니다. 물건은 비슷한 가치를 갖는 다른 물건으로 대체할 수 있지만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도, 사람을 물건으로 대체할 수도 없겠죠. 그런데 이러한 존엄성은 단순히 이성적 존재자가 가지는 특권 Sonderrecht이 아닌, 하나의 특별한 의무 Verpflichtung입니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자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하며, 타인의 존엄성을 침해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자연 속 유일한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이 지닌 하나의 숙명이자 과제입니다.

자보는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독약으로 자살하려 하지만, 유대인 수용소로 끌려가게 됩니다. 자보를 살리기 위해 한스를 찾아간 일로나는 되려 한스에게 겁탈을 당하죠. 일로나를 품에 안은 대신 자보를 살려주러 가겠다는 한스, 그러나 그는 자보 대신 자신에게 돈을 낸 유대인의 가족을 풀어주고 자보를 수용소로 보내버립니다. 그렇게 자보는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4. 결말: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영화를 먼저 감상하실 분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시간이 흘러, 한 노인의 80세 생일을 축하하는 레스토랑. 이 노인은 글루미 선데이를 부탁합니다. 그런데 노래를 듣고 쓰러지는 노인. 노인이 사망하자 사람들이 노인의 업적을 기리며 슬퍼합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입니다. 그 노인은 한스.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르게 그는 홀로코스트에서 유대인을 구한 인물로 소개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부엌에는 설거지를 하는 일로나와 그녀의 생일을 축하하는 그의 아들이 있습니다. 독이 들어있는 익숙한 병도 보이네요. 그렇다면 이 아이의 아버지는 과연 누구일까요?

사랑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영화. 글루미 선데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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