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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철학으로 해석하는 영화

백 엔의 사랑: 실존으로의 기투 I (feat. 사르트르 실존주의)

by 별_ 2020.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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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이치코는 32살이다. 동생처럼 엄마의 도시락 가게를 돕지는 않지만 엄마가 주는 돈으로 놀고먹으며 지내는 (동생의 말에 따르면) 한심한 인간이다. 그녀는 오직 100엔 샵에서 군것질거리와 잡지를 살 때만 집 밖으로 나간다. 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잔돈은 항상 받지 않는다. 씻지도 않고 더벅머리에 웃지도 않으며 상대를 자신 없는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이치코의 음울한 모습과 100엔 샵의 밝은 CM송은 극명한 대비를 보인다.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가 이치코를 ‚넌 100엔 짜리야 ‘라고 놀리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혼 한 여동생이 집으로 돌아온 지 일주일 만에 집에서 대판 싸운 그녀는 결국 엄마에게 돈을 받고 자취방을 얻어 독립을 하게 된다.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 사건은 이치코가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 외부와의 접촉이 없던 이치코가 처음으로 집 밖으로 나가고, 100엔 샵의 알바로 취직하면서부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100엔 샵에서 그녀는 다양한,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편의점에서 돈을 훔쳐 잘린 할머니는 매일 창고에 폐기물을 훔치러 오고, 같이 일하는 동료는 44살의 변태 이혼남이다. 점장은 학력에 콤플렉스를 가진 우울증 환자이다. 단골손님인 바나나맨(매일 바나나만 사서 바나나맨이라 부른다)은 은퇴를 앞둔 퇴물 복서이다. 마치 장자의 작품을 보듯이 등장인물에 평범한 사람이 한 명도 없다.

퇴물 복서인 카노가 이치코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다. 둘은 카노의 용달차를 타고 동물원에 간다. 재미없는 데이트 도중 이치코가 묻는다: „왜 나 같은 여자에게? “ 카노가 대답한다: „거절당하지 않을 것 같아서 “. 마치 파이란을 보는 것 같은 장면이다. 3자의 입장에서 잔인할 정도의 대답이지만 이치코는 누군가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는 점 때문에 호감을 갖게 된다.

바나나맨이 준 표로 이치코는 카노의 경기를 보러 간다. 초반에 잠시 밀어붙이던 카노는 이내 근성 없는 모습으로 허무하게 패하고 만다. 복싱경기가 끝나고 승자가 와서 패자 카노의 어깨를 두드려 준다. 이 모습이 이치코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는데, 동생에게 분노의 주먹을 날리는 자신과 달리 증오가 없이도 주먹을 날리고, 또 시합 후 서로를 위로해 주는 모습이 감동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치코는 위로가 필요한 인물이었다. 항상 듣는 쓰레기라는 말 보다 아무 말 없이 누군가 어깨를 두드려주기를 바랐고,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은퇴해서 백수가 된 카노는 100엔 샵 곳곳에 토를 하고 점장에 의해 밖으로 내던져진다. 이치코가 퇴근길에 그를 집으로 데려가고 그 후로 카노가 이치코와 같이 살게 된다. 이치코가 감기에 걸려 쓰러진 날, 카노는 이치코를 위해 고기를 구워준다. 아무것도 없이 큰 고깃덩어리를 구워온 것뿐이지만 (이치코의 돈으로 샀다) 이치코는 고기를 먹으며 오열한다. 무표정의 이치코는 자신의 내면에 슬픔을 쌓아놓고 있었다. 이 장면은 영화에서 이치코가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드러내는 장면이다. 이치코에게 누군가 자신을 위로해줄 대상이 처음으로 생긴 순간이다. 그리고 그녀는 카노에게 기댄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카노는 이치코를 성적 대상으로만 생각한다. 이치코는 카노가 알바를 구했다는 말에 정성을 다해 저녁을 차려 주지만 밥을 먹지 않고 집을 나가 버린다. 새로운 여자가 생겼기 때문이다.

세상에 자신의 편이 없다는 울분 때문이었을까? 이후 이치코는 복싱에 열중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목표를 가져보고 (프로복서) 그 목표를 이루어 낸다. 그렇게 무언가 열중할 수 있는 대상을 찾은 이치코는 점점 바뀌게 된다.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와 밥을 먹는 이치코. 복싱을 하며 지낸다고 말하는 딸이 웃음을 보이자 아버지는 감동받은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말한다:

„이치코, 좀 변했구나. “

변한 이치코는 매일 ‚쓸만한 놈이 한 명도 없어 ‘라고 외치는 점장을 뒤로하고 100엔 샵을 나선다. 그리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도시락 가게 일을 돕는다. 마치 ‚정신현상학‘에 나오는 변증법적 과정과 같다. 반성을 거쳐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온 이치코는 이전의 이치코와 다르다.

드디어 바라고 바라던 복싱 시합이 잡히지만 관장은 회의적이다:“복싱 우습게 보지 마“ 하지만 이치코는 도전한다. 그렇게 열심히 연습했지만 결국 이치코는 패배한다. 다행인 것은 버티고 버티면서 자신이 연습했던 왼손 훅을 한방 적중시켰다는 점이다. 그래도 4승 무패 4KO의 상대를 이기는 건 역부족이다. 나는 이 패배가 좋았다. 슬램덩크에서 북산이 전국 재패를 하지 못하는 것처럼 현실을 보여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영화지만 삶을 담고 있기에 영화일 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 누구도 태어나는 것을 선택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삶은 전적으로 우연적이며 준비되어 있지 않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세상으로 내던져진 삶, 이 무대를 „실존 Existenz “이라 부른다. 실존은 냉혹하고 차가운 현실을 나타내는 개념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를 휴머니즘이라고 말한다. 그의 생각은 이 명제로 표현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l'existence précède l'essence. “

사르트르에 따르면 우리는 자유롭도록 ‚선고‘받았기 때문에 선택의 연속인 삶 속에서 불안을 경험한다. 선택은 동시에 포기이기에, 그리고 온전히 나의 선택이기에 포기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부과한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것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실존이 보여주는 휴머니즘이다. 인간은 규정된 본질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성취해 나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다. 사르트르는 정해진 것이 없다는 불안함을 무엇이든 만들어 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바꾸었다.

"Der Mensch muß sich sein eigenes Wesen schaffen; indem er sich in die Welt wirft, in ihr leidet, in ihr kämpft, definiert er sich allmählich; und die Definition bleibt immer offen; man kann nicht sagen, was ein bestimmter Mensch ist, bevor er nicht gestorben ist, oder was die Menschheit ist, bevor sie nicht verschwunden ist."

"인간은 자신을 세계 안에 던지고(기투하고) 그 안에서 견디고, 싸우면서 점진적으로 규정되는 것을 통해 자신만의 고유한 본질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규정은 언제나 열린 채로 남아있다. 인간은 그가 죽기 전에 그가 어떤 규정적 존재라거나, 혹은 그가 사라지기 전에 인간이란 것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치코는 패배했지만 승자의 어깨를 두드려 준다. 이기고 싶었다고 서럽게 우는 이치코의 손을 카노가 잡아준다. 영화는 (마치 내레이션 같은) 노래와 함께 끝이 난다.

„곧 이 영화도 끝이 나니 시시한 내 얘기는 잊어 주세요. 지금부터 시작될 매일매일은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아도 평범한 날들이라 괜찮아요 “.

스스로 100엔짜리 여자라고 하던 그녀의 삶이 평범해진다니. 그것보다 멋진 변화가 더 있으랴. 일본어의 아프다痛い 와 살고 싶다居たい 는 독음이 같다. 하루하루 힘들고 아프다고 외치는 목소리는 채워지지 않은 실존이라는 도화지를 채워나가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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