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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철학으로 해석하는 영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하는가?I 공각기동대 (feat. 데카르트)

by 별_ 2020.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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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카르트와 방법적 회의

중세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데카르트의 시도는 ‘회의’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회의를 ‘방법적 회의’(doute methodique)라 부른다. 중요한 점은 여기서의 ‘회의’는 ‘회의를 위한 회의’가 아니라 ‘회의할 수 없는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회의’라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회의는 감각적 지각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의심의 근거는 감각적 지각이 종종 오류판단을 가져온다는 데 있다. 원기둥을 위에서 보면 원으로 보이고 멀리서 보면 직사각형으로 보이는 것처럼, 감각을 통해 알게 된 사물은 실제 사물이 가진 성질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감각적 지각 능력 전체를 부정한다. 감각 지각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가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데카르트는 올바른 인식에 닿을 수 없다고 본 것일까?

내 안에 있는, 확실한 지식에 이르는 능력을 데카르트는 ‘본유관념(innate idea)'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본유관념이 어디에서 연유하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인간의 이성 안에 ’ 내재되어 있다 ‘는 사실이다. 데카르트는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 즉 올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인 이성(bon sens)을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소유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중세의 세계관에서처럼 선택받고 종교에 귀의한 사람만이 계시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이르는 길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는 것이다. 이성이 있다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올바른) 인식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고, 이러한 인식능력을 통해 진리까지 나아가는 길을 정비하는 것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올바른 방법론의 확립이었다. 올바른 인식에 닿기 위해서는 이성을 소유하고 있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성을 올바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데카르트가 방법론을 중시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방법론이란 이성의 올바른 사용을 위해 지켜야 할 규칙을 말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 『방법서설』에서 자신의 방법론적 규칙을 네 가지로 요악한다:

1) 명증 하게 참이라고 인식한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

2) 검토할 문제들을 잘 해결할 수 있도록 각각의 대상을 가능한 한 작은 부분으로 나눌 것.

3) 내 생각들을 순서에 따라 (단순한 것에서 출발하여 복잡한 것의 인식에 까지 이르는) 이끌어 나아갈 것.

4)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았다고 확실할 정도로 완벽하게 열거하고 전반적으로 검토할 것.

그는 ‘지식’이란 이름에 ‘걸맞는 지식’을 원했다. 즉, 일반적으로 혹은 관습적으로 인정되는 지식이 아니라 그의 말대로 “명석판명(clare et distincte)한 지식”을 원했다. 그는 당시 시대의 다양한 과학과 철학이 확고하지 못한 토대에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진정한 지식이 얻어질 때까지는 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은 것에서 시작하지 않고 단계적으로 형성된 확고한 토대에 기초하여 사고를 시작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철학과 과학은 동일하게 확고한 토대를 가져야 하며, 기하학과 수학이 우리에게 본보기로 제공해 준 ‘증명의 확실성’과 ‘추리의 증거’ 같은 것이 우리에게 기초가 되기를 원했다. 이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은 처음부터 명석하고 판명하게 지각할 수 있는 것을 기반으로 삼아 이미 확고하게 세워진 것으로부터 명석하고 판명하게 도출되지 않는 것으로는 더 이상 나아가지 말자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조금이라도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것은 어느 것이라도 처음부터 긍정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가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기를 원한다면 그 결론은 완전히 확실하지 않은 가정에 기초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방법론적인 원칙으로서 “우리는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거짓으로 간주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명백하게 타당한 각 단계에 의해 탐구를 진행해야 하며, 명백한 것만을 가지고 시작하는 논증에 의해 참이라고 증명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어떠한 것도 참이라고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에서 밝히고 있듯, 지식이란 ‘명석판명한’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의심할 수 없는, 말 그대로 명석판명한 제1원리는 무엇인가? 아무리 근본적인 의심이라도 의심 그 자체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 없다. 즉, 나는 내가 의심한다는 사실까지도 의심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은 부정할 수 있지만 부정하는 행위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어서, 존재하지 않으면서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데카르트 철학의 제1 명제가 도출된다. 데카르트는 이 회의 불가능성을 확실성 혹은 명증성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명증 하다는 것은 명석한 동시에 판명한 지각의 상태를 말한다. 명석하다는 것은 정신이 인식 대상의 구성요소를 하나하나 세세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를 지칭하며, 판명하다는 것은 정신이 그 대상을 다른 대상과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을 때를 가리킨다.

"Cogito ergo sum"이라는 명제에서는 두 가지가 도출된다. 하나는 ‘나는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도출되는 다른 한 가지는 ‘내가 생각할 때,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정신과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는 궁극적으로 동일한 것이 아니며 밀접히 결합되어 존재하지만, 근본적으로 환원 불가능한 다른 종류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을 '이원론(二元論)'이라고 한다. 그의 결론은 몇 가지 가정에 기초하는데, 첫째, 행위자 없는 활동, 사고하는 주체 없는 사고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은 생각할 수 없다. 둘째, 단순한 물체 또는 연장된 실체는 사고할 수 없다고 가정한다. 셋째, 두 가지가 상호 독립적으로 인지될 수 있다면 두 가지가 상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데카르트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사고하는 자, 즉 정신이나 영혼일 뿐”이라고 결론짓는다. 『성찰』에 나오는 자아 존재의 증명과 자연적 사물의 존재 증명은 궁극적으로 정신과 신체를 포함하는 물질이 서로 다른 종류임을 밝히려는 시도이다. 신을 제외한다면 세계는 두 가지 유한한 실체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사유하는 것(res cogitans), 다른 하나는 연장된 것(res extensa)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유하는 실체’ 아니면 ‘연장된 실체’ 중 하나인데 이 두 실체는 서로 완전히 독립적이다. 실체란 아무리 모습이 바뀌고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변함없는 본질이다. 이것은 다른 변화를 만들어내지만 다른 것에 의존하지는 않는 특징을 지닌다. 연장은 물질, 물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데, 어떤 공간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사유는 공간상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연장’이란 성질과 구분된다. 정신의 실체는 바로 사유이다. 사유와 연장의 가장 큰 차이점은 분할 가능성이다. 연장은 ‘연장’이란 단어가 내포한 바대로, 나눠질 수 있는 것이지만 사유는 나눠질 수 없다. 이는 영혼의 불멸성을 증명하는 발판이 되기도 하였다. 영혼은 어떠한 연장성이나 공간적 크기를 지니지 않는다. 영혼은 분할할 수 없으며 나아가 파괴할 수도 없다. 연장을 본성으로 하는 물질적 실체만이 나눠지고 파괴될 뿐 크기나 넓이가 없는 정신적 실체는 파괴될 수 없다. 따라서 영혼이 불멸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데카르트가 말했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가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진리인가? 과연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나'라는 주체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데카르트는 말한다

"나는 내가 오직 하나의 생각하는 것으로서 연장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에 있어서 나 자신에 대한 명석․판명한 관념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체가 한갓 연장을 가지고 있을 뿐이요, 생각하는 것이 아닌 한에 있어서 신체에 대한 판명한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내 신체와 판연히 다른 것이요, 신체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

그런데 여기에는 논리적 결함이 있다. 만약 내가 신체가 아니라 '생각하는 주체‘라는 사실이 참이더라도, 여기서부터 내가 신체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도출되지 않기 때문이다(신체가 없는 정신으로써의 '나'가 지금의 나와 같은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신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가? 그리고 신체가 없는 나를 나라고 할 수 있는가?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생각하는 나‘의 존재가 가장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것은 메를로 퐁티가 ‚지각의 현상학‘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단순히 지금 나의 의식이 '나는 생각한다 ‘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생각한다 -> 나는 존재한다 라는 논증에는 사실 대전제인 '모든 생각하는 것은 존재한다'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유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대전제는 사실 검증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데카르트의 코기토 논증은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며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라는 사실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사고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라는 말에 그치고 만다.

*참고를 위한 칸트의 통각 개념: 데카르트는 cogito를 perceptio지각이라고 부른다. ego(나는) cogitatum(무엇인가를) cogito(생각한다)라는 명제는 '나는 무엇인가를 의식한다'라는 것과 동일한 명제이다. 이것은 데카르트에게 perceptio clara et distincta명석판명한 지각(명료하고 분명한)이다. 그런데 칸트는 aperceptio 통각을 이야기한다. (여기서의 a는 p 때문에 ad가 a로 변화된 것). 즉 덧붙이는 지각이 통각이다 (지각에 지각을 붙이는 것, 수반되는 지각) 이것을 명제로 표현해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생각한다, 내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는 것을" (z.B. 내가 저것을 본다고 의식한다. 이것이 통각이다). 통각의 활동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 내용의 틀을 이루어 주는 것이다.

 

2. 공각기동대 Ghost in the shell 1995

영화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한다:

„기업 네트워크가 지구를 뒤덮고 전자와 빛이 거리를 휘저어도 국가, 민족은 사라지지 않은 가까운 미래 정보 사회“

<공각기동대>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는 인간의 뇌가 기계화되어가는 시대이다. 인간의 기계화는 전투력의 강화와 편리함을 불러오지만 해킹의 위험성이라는 단점도 있다.

영화의 초반에 나오는 미화원은 영화가 가진 문제의식을 잘 보여준다. 그는 이혼하자는 부인의 말에 부인의 외도를 의심하며 해킹을 시도한다. 그런데 공안 9과에 끌려가서 자신의 실체를 알게 된다. 그가 믿었던 천사 같은 딸, 아내 모두 해킹당해서 자신의 뇌에 주입된 거짓 정보였던 것이다. 그러한 정보가 주입된 순간 ‚나‘라는 주체는 그 정보들을 내가 직접 경험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런데 사실 그 정보들은 환상이다. 이것은 ‚단지 속의 뇌 brains in a jar‘ 논증을 연상시킨다.

‚단지 속의 뇌‘이론은 극단적인 회의주의의 예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가 실재한다고 믿지만 사실 우리는 어느 사악한 과학자에 의해 지속적으로 자극을 주입받는 항아리 속의 뇌뿐 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우리의 신체나 세계는 외부 자극에 의해 주입된 환상에 불과하다. 이 이론은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에 기초하는 것으로 보인다. 데카르트 역시 <성찰> 속 방법적 회의에서 우리의 경험이나 인식이 교활한 악마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을 하기 때문이다. 앞의 글에서 보았듯이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이 나의 존재까지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중반부에 쿠사나기 소령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자신의 동료인 버트에게 말한다. „사이보그라면 누구나 생각할 거야, 어쩌면 자신은 아주 옛날 죽었고 지금 난 전뇌와 의체로 구성된 가짜 인격이 아닐까 하고. 아니면 „나 “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 „자기 뇌 속을 본 사람은 없어. 주변 상황을 보고 ‚나‘다운 게 뭔지 판단하는 것뿐이지. 만약 전뇌가 고스트를 만들고 거기에 혼을 넣는 거라면 무슨 근거로 자신을 믿지? “ 이 대사는 개인적으로 상상해 보던 내용과 매우 유사해서 흥미로웠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살면서 죽을 ‚뻔‘한 경험을 한다. 죽지 않았으니 살아 있겠지만 사실은 그때 크게 다쳐서 혼수상태에 빠져있는 거라면? 아니면 사실은 이 세계와 평행을 이루는 다른 세계가 다른 차원이 있어서, 죽고 나면 그 세계로 의식하지 못한 채 옮겨지는 거라면? 이러한 상상은 <강철의 연금술사>의 애니판 결말이나 이토 준지의 <벽>에도 잘 나와있다.

아무튼 인간의 뇌가 기계화되어서 사이보그가 되어도 저런 생각을 한다고 하니 (쿠사나기는 자신이 완벽한 사이보그라고 말한다) 다음과 같은 의문이 따라오게 되는 것이다: 기계로 된 뇌를 가진 사이보그도 인간과 같은 의식을 가질 수 있는가? 사이보그가 인간과 같은 의식을 가질 수 있다면 인간 의식이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은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가?

******여기서부터는 내용적으로 중요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음 *******

공안 6 과가 미국 출신의 범죄자라 고하는, 그래서 자신들이 회수해야만 한다고 하는 ‚인형사‘는 사실 공안 6 과가 만들어 낸 프로그램이다. 그들은 외교에 있어 해킹을 통해 유리하게 이용하고자 '코드명 2501'이라는 작업을 수행했고 그때 만들어진 게 ‚인형사‘이다. 즉 공안 6과는 ‚인형사‘가 범죄자여서 쫓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거짓말이다. ‚인형사‘가 생각보다 높은 수준의 자의식을 갖자 외교상 비밀이 누설될 것을 두려워해서 이 프로그램을 회수하려 하는 것이다.

인형사는 말한다:

„나에게 육체는 없었다 “, „9과에 온 것은 나의 의지다 “, „하나의 생명체로써 정치적 망명을 희망한다 “, „나는 A.I.(인공지능)가 아니다. 정보의 바다에서 태어난 생명체다 “, „인간은 유전자라는 기억 시스템을 통해 기억에 의해 인간이 된다. 기억이 환상이라도 인간은 기억으로 살아간다 “.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 역시 하나의 프로그램이며 생명체라는 규정은 과학으로 증명되기 힘든 불확실한 것이다. 자신은 육체가 없이 존재하고, 인간에 의해 프로그래밍되었다고 해도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자기 자신을 하나의 생명체로 인식하고 있다. 인형사가 제기하는 문제제기는 매우 도발적이다. 과학기술로 의식까지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그러나 설령 의식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의식이 무엇인지, 정신이 무엇인지, 정신과 육체의 결합은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 같다.

영화 후반부의 총격전에서 벽화 속 나무의 모습이 총격전에 의해 훼손된다. 나무의 열매 부분에는 라틴어로 과거의 생명체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그리고 아직 지워지지 않은 나무의 꼭대기에는 라틴어로 ‚인간‘이라고 쓰여 있다. 이 장면은 결국 나중에는 인간 역시 이전의 종처럼 ‚종의 나무‘에서 지워질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쿠사나기는 인형사가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매력을 느껴 더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프로그램이 회수되기 전에 자신이 접속하여 인형사와 직접 대화를 시도한다. 인형사는 쿠사나기에게 융합을 제안한다. 생명체는 자손을 남기고 죽는 프로세스를 갖는데 자신은 그것이 없기에 아직 불완전한 생명체라고 말한다. 자손을 남기는 것은 단순한 복제와는 다른데, 복제는 동일성만을 남기는 것이지만 다양성이나 개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일성은 바이러스 하나로도 전멸할 위험성을 갖고 있다 (하나의 예로, <지나 사피엔스>에서 지적하듯이 XX염색체를 가진 여성이 XY 염색체를 가진 남성보다 더 오래 생존할 가능성이 높은데, 여분의 동일한 성염색체를 가진 여성보다 대체할 염색체가 없는 남성이 돌연변이나 바이러스에 더 취약하다). 종의 존속을 위해 개체는 다양성을 남기고 죽는다. 이러한 생명체의 프로세스를 갖기 위해 인형사는 쿠사나기와의 융합을 제안한다. 융합은 두 정신이 합쳐지면서 새로운 개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집합체를 인형사는 ‚상부구조‘라고 표현한다. 쿠사나기의 눈 앞에 천사의 모습이 보이면서 인형사와 쿠사나기는 저격당한다. 인형사는 머리가 파괴되지만 쿠사나기는 동료 버트의 도움으로 목이 잘려나가지만 두뇌를 지켜낸다. 쿠사나기는 구원받은 것일까?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이 자의식을 갖는 것뿐 아니라 생명의 프로세스를 이해하고 자신이 더 높은 상부구조로 나아가기 위해 다른 사이보그와 융합한다는 것까지 생각해낼 수 있을까?

마지막 장면, 쿠사나기의 새로운 신체 (데카르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연장‘)는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새로운 존재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버트가 묻는다. 인형사가 아직 몸속에 있냐고. 그러자 새로운 모습의 쿠사나기가 답한다:

„어른이 되고 나면 어린 시절을 버리네 (고린도 전서 13:11이라고 함). 이젠 인형사란 프로그램도 소령이란 여자도 없어 “.

쿠사나기와 코드명 2501의 융합체, 새로운 그 존재는 이제 생명의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쿠사나기의 기억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융합체는 이제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 인형사의 방대한 네트와 결합한 융합체는 더 높은 상부구조로 올라갈 수 있을까? 몇 번을 봐도 언제나 어려운 영화지만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준다는 점에서 볼 때마다 즐겁다.

*한 사람의 의식을 가장 잘 나타내는 신체기관이 바로 눈이다. <공각기동대>에서 뇌가 기계화된 캐릭터의 눈을 보면 그 묘사가 매우 사실적이라 놀랍다. 비슷한 이야기인데 눈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눈이 죽은 사람의 의식은 환경미화원과 같을 것이다. 심연을 너무 오래 들여다본 사람의 눈은 빛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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