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끄적끄적/소고 (小考)

기안84에 대한 주호민의 소신 발언 '시민 독재'에 대한 나의 생각

by 별_ 2020. 9. 26.
반응형

사진 출처: 주호민 작가 SNS

얼마 전 기안84의 네이버 연재 웹툰 '복학왕'과 관련한 여성 혐오 이슈가 있었다. 웹툰 내에서 '봉지은'이라는 만화 캐릭터가 회식 중 수달처럼 배 위에 조개를 내리치는 장면이 나온 뒤 회사 인턴에 합격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몇몇 네티즌들이 이 장면을 보고 능력과 스펙이 없는 봉지은이 이른바 '성 상납'을 통해 회사에 합격하는 것을 암시하는 게 아니냐며 비판했고 비판의 불길은 작가 기안84의 '여혐 논란'이라는 거대한 장작에 옮겨붙었다. 이후 기안84는 매우 큰 비난에 직면했고 출연 중이던 '나 혼자 산다'에도 한 달간 출연하지 않았다 (물론 개인 스케줄이 바빠서라고 해명하긴 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그리고 이번에 '신과 함께'로 유명한 동료 작가이자 트위치 스트리머로도 활동 중인 주호민 작가가 이에 대해 소신 발언을 했다. 먼저, 이해를 돕기 위해 그의 소신 발언 전문을 인용해 보겠다:

만화는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지만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게 있다. 전쟁 피해자라든지 선천적 장애 같은 것을 희화화하면 안 된다. 그걸 희화화하는 만화들이 있었다. 그런 건 그리면 안 된다.

 

그런데 그것과는 구분해야 한다. 지금 웹툰 검열이 진짜 심해졌다. 그 검열을 옛날엔 국가에서 했다. 지금은 시민이, 독자가 한다. 시민 독재의 시대가 열렸다. 이거 굉장히 문제가 크다. 큰일 났다. 진짜. 이러면 안 된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자신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 이런 생각 때문에 보통 일어난다. 그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런 생각들, 자기가 갖고 있는 생각들이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나 작품을 만났을 때 그것을 미개하다고 규정하고 계몽하려 한다. 그러면 확장할 수 없다.

 

‘내 생각이 맞는 이유가 니가 미개해서가 아니고 내 생각과 같이 하면 이런 것들이 좋아진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런 적이 없다. ‘너는 미개한 놈이야’, 이런 걸로 가니까 반발심이 생기고 이상해진다.

 

미국도 그렇고 시민 독재가 더 심해질 것이다. 그래서 희망이 없다. 옛날에 만화를 그리던 때가 최고, 제일 좋았다. 내가 그리던 2000년대가 제일 좋았다. 지금은 시민이 시민을 검열하기 때문에 무얼 할 수가 없다. 아주 힘겨운 시기에 여러분은 만화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 그 생각을 해야 한다. ‘그려도 되나?’ ‘이거 해도 되나?’ 그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정상이 아니다. 아무튼 안타까운 상황이다. 그래서 나는 유튜브나 하려 한다. 문제가 뭐냐하면 잘못을 안했는데도 아작이 난다.

 

심지어. 잘못 걸리면. 그래서 사과하면 뭐라는지 아나. 잘못한 게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사과해도 ‘진정성 없다’고 한다. 그냥 죽이는 것이 재밌는 것이다. 사과하면 더 팬다.

 

아무튼 굉장히 피곤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공소시효도 없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이런 말 한다고 달라지겠느냐. 이거 퍼가서 또 욕할 거다. 상관없다. 아무튼 고맙다.

주호민 작가의 소신 발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웹툰이 시민들에 의해 검열 당하고 있다. 그런데 그 정도가 매우 심각해서 작가들이 온전히 자신만의 웹툰을 그리기 쉽지 않을 정도다. 이러한 시민 검열은 시민들이 갖는 '도덕적 우월감'인데 이러한 우월감 때문에 상대를 계속해서 계몽하려고 든다. 이러한 계몽은 보편적 기준이 없기에 잘못했든 잘못하지 않았든, 심지어 사과를 해도 계속 비판을 당한다.

나는 주호민 작가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인터넷이 보급된 이후로 우리는 이른바 '대 혐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넷이라는 물리적 공간 제약이 없는 매체를 통해 상대에 대한 비판은 더 쉬워졌다. 먼저, 비판을 할 만한 대상을 찾는 게 쉬워졌다. 그 대상이 어디에 살든 큰 잘못이든 작은 잘못이든 인터넷 뉴스나 유튜브를 통해 비난받을만한 행동은 금방 세상에 널리 알려진다. 한 가지 무서운 점은 공간의 제약이 없기 때문에 대상에 대한 '직접적 비판' 역시 매우 쉬워졌다. 세계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 욕먹을 짓을 해도 인스타그램 DM이나 댓글로 직접적으로 욕을 할 수 있는 시대다. 얼굴이 많이 알려진 연예인이나 유명 인사들은 그만큼 작은 행동에도 쉽게 대중의 비판 대상이 된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과연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이 댓글이나 메시지로 '집단 린치'를 가하는 것이 과연 절차적으로 정당한가?라는 질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다. 인터넷을 통한 집단 린치에는 사회나 법률적으로 동의를 얻은 기준이 없다. 기준이 없기에 린치는 전적으로 자의적 정의감이라는 매우 '비'필연적이고 '비'보편적 기준에 따라서 이루어지며, 그렇기 때문에 절차적 정당성을 얻기 매우 힘들다. 주호민 작가가 올바르게 지적한 대로, 이러한 기준은 대부분 상대에 대한 '도덕적 우월감'에 기초하고 있기에 상대가 사과하는 것은 린치를 멈추지 못한다. 린치는 '정의 구현'의 수단으로 인식되고, 그로 인해 발생한 무고한 피해자들은 나중에 정의를 위한 주춧돌 정도로 치부된다. 또한, '어디까지 린치가 가해져야 하는가?'도 적절한 기준이 없다. 어떤 경우에는 당사자의 사과까지 린치가 계속되지만 어떤 경우에는 당사자의 죽음 뒤에야 린치가 끝나게 된다. 이러한 도덕적 우월감에 기초한 인터넷 악플 공격은 겉으로는 '나보다 도덕적이지 않은 대상'을 계몽하기 위함으로 보이지만, 깊은 내면에 깔려있는 진짜 목적은 '상대의 도덕적 계몽' 따위가 아니라 '상대보다 높은 자신의 도덕성을 확인' 하려는 '자기만족'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실제 유명인이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그들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인터넷 집단 린치는 계몽의 탈을 쓴 사디즘이다. 자신보다 잘나가거나 유명한 인물이 사실은 자신보다 낮은 도덕성을 가진 인물이었고, 그러한 하마르티아 (과오)에 의해 몰락하는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가장 뛰어난 비극의 조건으로 영웅이 하마르티아에 의해 몰락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유명인을 보며 느끼는 쾌감. 나는 이러한 쾌감이 우리 사회를 더욱더 '대 혐오의 시대'로 몰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과를 하면 더 팬다. 왜냐하면 이제 그 사람은 나의 말에 굴복하는 만만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국회에서 여성 비하적 발언을 하는 국회의원들을 수없이 본다. 하지만 그들이 백번 여성 혐오적 발언을 해도 사람들은 그들을 욕하지 않는다. 욕을 해도 금방 멈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굴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굴복하고 사과하는 기안84는, 매우 슬프지만, 앞으로도 사람들의 높은 도덕적 요구를 강요받는 인터넷 집단 린치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나는 행위이론과 도덕을 연구하는 연구자이며 인간이 자신이 자발적으로 한 행위에 대해 법률적이 아니더라도 도덕적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비도덕적인 행위를 한 사람이 비난받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거나 그들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처벌은 절차적으로 정당성을 지녀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FM으로 군장을 싸도 마음만 먹으면 선임은 후임을 털 수 있다. 시민 검열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런 사회는 전혀 정의롭지 않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