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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독기를 품으면 못해낼 일이 없다 외국인의 신분으로 독일의 대학에 들어가려면 독일어 어학시험 성적이 필요하다 (영어로 진행되는 과정은 영어 시험 성적을 요구하기도 한다). 학생들이 치는 시험은 보통 "테스트다프 TestDaF"나 "데에스하DSH"가 있는데 나는 DSH를 쳤다. 사실 독일에 올 때만 해도 무슨 시험이 있는지도 몰랐고 그냥 어학원에서 DSH를 준비한다고 하니까 한 거다. DSH는 Deutsche Sprachprüfung für den Hochschulzugang의 약자로, '고등교육을 위한 독일어 시험'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보통 이 시험은 독일의 대학에서 출제하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칠 수 없고 오직 독일에서만 볼 수 있는 시험이다. 점수는 DSH 0부터 3까지 있는데 0이 가장 낮은 점수고 3가 가장 높은 점수다. 보통 .. 2020. 9. 25.
철학 시간에 교수님이 점 봐준 이야기 철학과를 다니는 학생들은 누구나 한번쯤 '너 점 볼 줄 아니?'라는 질문을 들어봤을 것이다. 이 질문은 어느 정도 오해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나 역시 전공 수업 때 점을 보는 법을 배우고 점을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졸업을 앞두고 마음이 뒤숭숭하던 때였다. 당시 나는 '주역'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중간고사가 끝난 뒤 잠시 쉬어가는 의미로 주역 점을 보는 법을 배우고 직접 자신의 미래를 알아보는 시간이 있었다. 주역점은 음과 양으로 이루어진 8괘 두 개를 통해 나오는 64가지의 괘 효상을 읽어내는 것이다. 한 괘 한 효는 어떤 상황 아래서의 인간의 행위가 다른 효 즉 다른 인간과 어떤 관계 맺음을 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기에 64 괘는 인간의 행위를 64가지 유형의.. 2020. 9. 25.
키스를 보는 사람과 키스를 찍는 사람 대학교 때 교양수업으로 '미술사'라는 과목을 들은 적이 있다. '미술사는 공부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점수 따기가 쉽지 않다'는 선배들의 말을 듣긴 했지만 나에게는 '대학이 아니라면 듣기 힘든 수업'이라는 메리트가 훨씬 더 크게 작용했기에 망설임 없이 수업을 들었다 (재미있게 들으니 점수도 잘 나왔다). 개인적으로 지루했던 건축사 부분이 끝나고 근대 회화로 넘어오니 슬슬 내 마음에 드는 그림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중 내 맘을 빼앗은 그림이 있었는데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디트'라는 그림이었다. 적장의 목을 들고 옷을 풀어헤친 채 뭔가 당당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듯 한 유디트, 심지어 클림트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황금색이 더해져서 더더욱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미술사 수업 이후에 한동안.. 2020. 9. 25.
9학기 동안의 석사 과정이 내게 남긴 것 글의 제목을 보고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아니 누가 석사를 9학기, 그러니까 4년 반이나 하나? 보통 석사는 2년에 끝내는 거 아닌가? 그런데 남들의 두배가 넘는 4년 반을 석사과정에 있었다. 심지어 학사를 7학기에 끝냈으니 학사보다 1년이 더 걸려서 석사를 겨우겨우 끝낸 것이다. 나의 석사과정이 이토록 길어지게 된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언어문제였다. 독일어라고는 "Hallo"만 알던 나는 어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한 끝에 1년 만에 대학 입학을 위한 독일어 자격시험에 합격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어학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고 (물론 이 착각은 나중에 라틴어와 희랍어를 배우면서 깨지게 된다) 이제는 독일어를 잘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학에 입학하니 강의실에서 내가 독일어를 가장 못했다... 2020. 9. 25.
낙태는 허용되어야 하는가? I Jeff McMahan, The Ethics of Killing: Problems at the Margins of Life, 4장 낙태 부분 0. 도식 저자인 McMahan이 이 책의 4장 Beginnings에서 처음으로 제기하는 질문은 "낙태는 허용될 수 있는가?"이다. 그리고 McMahan의 질문은 Yes. 그렇다면 여기서 또 의문이 생긴다. 보통 사람들은 살인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런데 왜 살인은 안된다고 하면서 낙태는 허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걸까? 즉, 이 질문은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다 - "왜 인간의 죽음은 태아의 죽음보다 나쁘다고 여겨지는가?" 1. 전제 저자인 Jeff McMahan의 논의는 인간의 정체성 Identity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 정체성의 규정 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논의가 있어왔다 (예를 들어: 영혼, 인간 유기체, 의식 등등). McMahan이 채택하.. 2020. 9. 24.
"Überlegungsgleichgewicht" von John Rawls und Nelson Goodman 0. Urteilskraft „Urteilskraft überhaupt ist das Vermögen, das Besondere als enthalten unter dem Allgemeinen zu denken. Ist das Allgemeine (die Regel, das Prinzip, das Gesetz) gegeben, so ist die Urteilskraft, welche das Besondere darunter subsumiert, [...] bestimmend. Ist aber nur das Besondere gegeben, wozu sie das Allgemeine finden soll, so ist die Urtheilskraft reflektierend .“ (KU. Einl.ⅩⅩⅥ).. 2020. 9. 24.
Die Brauchbarkeit der Kantischen Geschichtsphilsophie Warum „stahlt die vollends aufgeklärte Erde im Zeichen triumphalen Unheils“? Das war die Hauptfrage von Horkheimer und Adorno in Dialektik der Aufklärung. Als sie das Buch schrieben, gab es ein aktuelles Beispiel. Es war damals fraglich, warum der Faschismus und Nazismus, die sehr unvernünftig aussehen, sich in einer durch die Vernunft aufgeklärten Gesellschaft entwickeln. Die Thesen darüber von.. 2020. 9. 24.
죽음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1. 올해 전 세계의 가장 큰 이슈는 코로나 바이러스다. 하지만 몇 년 전까지 유럽은 테러의 위협이 가장 큰 이슈이던 때가 있었다. 어느 날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친구와 술 한잔 하며 이런 이야기를 했다: "테러범이 쓰레기통에 폭탄 설치 해 놓으면 우리 다 죽는 거 아니야?" 그런데 바로 다음 날 베를린의 크리스마스 마켓에 트럭이 돌진하는 테러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2. 어릴 적에 '삼풍 백화점'이란 곳에 갔다. 이름이 특이해서 기억에 남는 백화점이었다. 그곳에서 게임기 하나를 사고 일주일 뒤, 티브이를 보고 있는데 뉴스 속보로 "삼풍 백화점 붕괴"라는 자막이 떴다. 그때 처음으로 '붕괴'라는 단어의 뜻을 배웠기에 1년 뒤에 '성수대교 붕괴' 때는 더 이상 엄마에게 붕괴라는 단어의 뜻을 물어보지 않았다... 2020. 9. 24.
감사합니다, 야구할 수 있음에 지난 주말에 팀 동료 마틴의 Farewell-party가 있었다. 마틴은 슬로바키아 국가대표 야구 선수인데, 어쩌다 보니 분데스리가가 아니라 우리 팀에서 뛰게 되었다. 국가대표 포수였던 마틴은 정말 말 그대로 '어나더 레벨'이었고, 작년 시즌 우리 팀 최고 타율을 기록했다. 실력뿐 아니라 친화력도 좋았던 마틴은 독일어를 하지 못하지만 팀에 잘 녹아들었고 팀에 언제나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어넣어주었다 (normalermensch.tistory.com/35에 나왔던 벤치 클리어링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특히 같은 외국인의 신분이라 마틴과 유독 친하게 지냈던 나는 마틴과의 이별이 더더욱 아쉬웠다. 마틴을 보내고 자전거를 타고 집에 오는데 문득 그냥 '감사하다'라는 말이 계속 떠올랐다. 좋은 팀원들을 만날 수 있.. 2020. 9. 24.
아끼다 똥 된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라는 애니메이션 속 한 장면, 칠판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Time waits for no one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애니메이션을 본 지는 한 참되었지만 이 문구는 오랫동안 잊히지가 않는다. 국방부 시계를 거꾸로 달아놔도 시간은 가고, 부모님이나 가족들이 언제까지나 함께 하길 바라지만 흘러가는 세월도, 이별도 막을 수 없다.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 것이 또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기회'다. 한번 놓친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고, 준비된 자만이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기회는 바로 지금 이 순간 잡아야 하는 것이다. 4부 리그에서 내 타율은 3할이 조금 넘었다. 10번 중 3번 안타를 쳤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수준이 높은 3부 리그에서 저번 시.. 2020. 9. 24.
야구와 인생의 공통점 내가 야구라는 스포츠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인생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야구가 어떤 면에서 인생과 비슷한지 정리해보려고 한다. 1.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 프로야구는 보통 "3연전"이라고 해서 한 팀과 3일 연속으로 대결을 한다. 재미있는 점은, 아무리 강팀이라고 해도 매일 승리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1위 팀과 10위 팀이 대결해도 10위 팀이 이길 때가 있고, 그 전날 10:0으로 졌던 팀이 다음 날 1:0으로 승리하기도 한다. 오늘 실책 했다고 해서, 안타를 못 쳤다고 해서, 실책 했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가 없다. 다음 경기는 새로운 경기고, 완전히 새로운 상황이 펼쳐진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불행이 한꺼번에 몰아쳐 올 때도 있고 생각지도 못했던 행운이 찾아오기도 한다. 소위 .. 2020. 9. 24.
르네 마그리트 - 헤겔의 휴일 마그리트의 그림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당혹감을 느끼게 한다. 그는 익숙한 사물을 과장하여 크게 그리거나 전혀 다른 배경에 배치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일반적이지 않은 대상들의 대비는 마그리트가 마치 자신의 작품을 통해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풀어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의 작품에 생각의 즐거움을 더하게 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바로 제목이다. 직관적으로 그림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제목은 책의 앞부분에 쓰인 설의법처럼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헤겔이 사용하는 '규정적 부정 bestimmte Negation'이라는 개념은 스피노자의 명제인 "모든 규정은 부정이다 Omnis determinatio est negatio"에서 나왔다. 이 명제를 이용하여 헤겔은 부정이 가진 '규정 Bestim.. 2020. 9. 24.